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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0 (금)

[송민순의 한반도평화워치] 한국은 북핵 중재자 아니다…과감한 플레이어로 나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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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협상, 핵 보유 전·후 양상 판이

셈법 큰 차이로 협상 진전 난망

한국은 한반도 비상상황 상정해

핵정책 재검토 등 다층 대비해야



북핵 대하는 한국의 자세



중앙일보

지난 6월 30일 판문점 북측 지역에서 악수하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판문점 남측 지역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에 참석하지 못 했다.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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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8월 프랑스의 상업위성 스폿(SPOT)이 촬영한 영변 핵 시설의 사진이 공개됐다. 북한의 핵 개발이 표면으로 떠오르자 우리 정부와 국민은 경악했다. 영변을 외과 수술식으로 폭격하거나 한국도 핵무기를 개발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당시 미국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는 최호중 외교부 장관에게 급히 친서를 보냈다. 미국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북한의 핵 야심을 막을 테니 한국은 일방적인 행동을 자제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약속은 무색해지고, 2017년 말을 기점으로 북한은 사실상 세계 9번째의 핵보유국으로 등장했다.

이제 북한은 미국 대통령을 태평양 건너로 불러내 ‘북핵 폐기’가 아니라 ‘군축’ 협상을 벌이고 있다. 30년 전 북핵 문제가 등장했을 때 필자와 함께 고민하던 미국 관리와 학자들은 최근 “한국은 이미 북한의 핵무기 위협 하에 살고 있다. 미국을 타격할 장거리 핵미사일(ICBM)은 최소한 두어 번은 더 실험을 해봐야 하니 이걸 막는 것이 급선무다”라고 주저 없이 말했다.

워싱턴이 서울을 설득해온 긴 역사를 아는 친구들로부터 직접 각성제 주사를 맞은 것 같았다. 그들이 상정하는 것처럼, 핵으로 무장한 북한과 미국의 핵우산 보호를 받는 한국이 그럭저럭 공존할 수 있는가? 한국은 핵우산의 비용을 어디까지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또 언제든지 우산을 걷어낼 수 있다는 불안 속에 살 수 있는가? 한국이 북한은 물론 주변국 모두에게 ‘을’로서 살아가도 되는가?

북한, 핵 폐기 아닌 군축 협상 벌여

이 물음들에 대해 일각에서는 핵 협상과 남북 관계가 진전되면 남북이 우호 공존하는 가운데 핵 문제도 해결될 것이라고 희망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김정은이 인민의 생활 향상을 정권의 기반으로 삼기 때문에 제재로 계속 압박하면 결국 핵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실패의 기록을 희망과 기대로 덮을 수 있는 시간은 이미 지나가고 있다. 가당치는 않지만, 북한은 과거 프랑스가 추구했던 길을 가는 중이다. 1959년 대통령으로 돌아온 드골은 미국과 영국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핵무기만이 영원한 차이를 만든다”면서 프랑스를 핵보유국으로 등장시켰다. 유럽 질서에 있어 프랑스의 위상도 바뀌었다.

그런데 한국과 미국은 ‘핵무기 보유 이전의 북한’을 대하던 시각으로 협상에 임하고 있다. 핵 보유 이전에는 핵 열차를 우선 정지시키는 데 합의한 다음 순차적으로 뒤로 돌린다는 구도로 협상했다. 그러나 지금은 핵 열차의 정지 합의가 사실상 무기한 핵 보유로 가는 문을 여는 것이다. 되돌리기 위한 대가도 지불하기 어려울 만큼 높아지고 있다.

그나마 가느다란 협상 진전의 기회가 보이기도 했다. 올해 2월 하노이 회담에 등장한 영변 핵 시설 폐기와 5개 대북 제재의 해제를 교환하는 방안이었다.

1단계 행동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제재는 다시 부과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영변 지역의 핵에 국한되더라도 일단 폐기된 시설과 물질을 검증하면 북한 핵의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당시 협상 결렬에는 미국의 국내 정치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트럼프는 미국 민주당이 자신에 대해 불리하게 증언하는 전 변호인을 때맞춰 의회에 소환함으로써 하노이 협상을 망쳤다고 공개 비난했다. 자신의 스캔들을 희석하기 위해 북한과의 거래를 무리하게 성사시켰다는 비판은 받고 싶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북·미 실무회담 열려도 진전 어려워

미국 국내 정치는 북핵 같은 대외 협상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역으로 한국도 동맹국의 생존 문제임을 내걸어 미국 국내 정치에 영향을 줄 수 있다. 하노이 경우에 우리 정부가 그런 영향력을 과감하게 시도했더라면 어땠을까. 미국은 북한의 핵물질 이전 가능성 때문에 고농축 능력을 가장 우려한다. 일정 기한 내 농축시설의 완전 폐기와 북·미 관계 정상화를 교환하는 2단계의 행동을 함께 묶어 타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핵무기는 다음 3단계에 폐기하는 것이다. 만약 북한이 의무 이행에 뒷걸음질 칠 경우, 한·미가 강압적 수단을 동원한다는 공동 행동 계획이 필수다.

그런데 이달 초 스톡홀름의 북·미 실무협상도 서로 기존 자세의 틀을 유지한 채 결렬되었다. 미국은 북한의 핵·장거리 미사일 실험 중단과 제재 유지를 양손에 쥔 채 단계적 거래를 원한다. 그런데 북한은 제재 하에서 협상을 지속하기 어렵다. 지금 김정은은 트럼프와의 ‘아름다운 편지’에 묶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일종의 림보(limbo) 상태에 있다. 북·미 대화를 원하는 중국에 대한 명분 축적용으로도 연말까지는 협상을 이어가겠지만, 2차 실무회담이 열리더라도 몇 가지 사정상 실질적 진전이 어렵다.

첫째, 북·미 간 협상의 구도가 기본적으로 어긋나고 있다. 북한은 핵 보유 이후 ‘체제 안전 보장’을 유난히 강조하고 있다. 세 분야의 안전에 관한 조건을 말한다. 가장 시급한 경제 분야는, 제재 해제는 물론 그간 제재로 인해 낙후된 경제를 부흥시킬 조처를 하라는 것이다. 군사적으로는, 김정은이 올해 신년사에서 주장했듯이 한반도 안팎에서 북한을 겨냥한 미국의 전략자산 배치를 금지하라는 것이다. 미군이 한국에 주둔할 수 없게 하는 조건이다. 정치적으로는, 북한의 체제나 인권 같은 문제에 대해 간섭하지 말고 외교 관계를 수립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그런 장기적 과제에 관심이 없다. 게다가 북한은 ‘완전하고 되돌릴 수 없는 적대시 정책 철회’라는 옷으로 갈아입으면서, 안전 보장의 수위를 ‘탄탈로스의 연못’처럼 오르락내리락한다. 미국이 수용하기는 더 어려워진다.

둘째, 격화하는 미·중의 전략적 대립이 북한의 행동 공간을 넓혀주고 있다. 북한이 당장 필요한 제재 해제를 위해 유연한 거래에 나설 것으로 기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한은 이미 상당한 안전망을 깔아두고 있다. 올해 6월 시진핑은 평양에서 “중국은 북한의 합리적 ‘안보 우려’와 ‘발전’에 관한 관심사를 해결할 수 있도록 힘이 닿는 한 도울 것”이라고 했다. 중국이 미국에 대해 북한의 ‘합리적 안보 관심사’를 수용하라고 요구한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적대 정책 포기, 관계 정상화, 한국에 대한 핵우산 제거를 골자로 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발전’에 대한 관심사를 추가했다. 미국이 대북 제재를 계속하면 중국으로서는 북한의 뒤를 봐줄 수밖에 없다는 뜻이 내포돼 있다.

감성적 판단으론 안위 보장 못 해

셋째, 미국 국내 정치 환경에 비추어 트럼프가 ‘유능한 협상’을 하기 어렵게 되고 있다. 북한은 트럼프가 처한 탄핵 정국을 이용한 제재 해제를 기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트럼프는 이미 우크라이나 사건처럼 국내 정치 목적으로 대외 관계를 악용한다는 비난에 휩싸여 있다. 북한이 원하는 거래는 미국 정치 시장에서 역풍을 맞을 가능성이 더 크다.

지금 트럼프의 대선 시계와 김정은의 연말을 향한 시계가 마주 보고 똑딱거린다. 트럼프는 북한의 핵·장거리 미사일 실험 중지라는 기존 득점을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면 언제든지 다른 길을 선택할 것이다. 반면 김정은은 미래가 불확실한 트럼프에게 정권의 생존이 걸린 양보를 먼저 하지는 않을 것이다. 엊그제는 더는 림보에 머물러 있지 않고 대미, 대남 공세의 수위를 올리겠다는 신호로 ‘인민의 분노’를 동원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 먼저 지금이라도 한국이 중재자가 아니라 자기 카드를 가진 과감한 플레이어로 자세를 전환해야 한다. 아울러 한반도 비상상황을 상정한 군사 태세를 단단히 해야 한다. 전쟁은 끝났다는 감성적 판단으로는 나라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다. 끝으로 우리의 핵 정책을 재검토해야 한다. 2006년 6자회담이 교착되고 앞길이 막히자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도 자체 핵연료 주기를 갖출 수밖에 없다”면서 검토를 지시했다. 그의 말이 귓속에 맴돈다. 이 모든 대비는 국론 단합과 한·미 간 신뢰에서 시작된다.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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