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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남정욱의 영화 & 역사] 라디오 해적 방송이 만든 쿠바 혁명의 이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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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아르헨 명문가 출신 체 게바라… 쿠바서 입신양명, 볼리비아서 총살

사춘기 때 성욕 주체 못 해… 7개월 오토바이 여행 후 공산주의자로

콩고·볼리비아 혁명 기획했다 실패, 농촌 게릴라 시대 이미 막 내려

조선일보

남정욱 작가


누구는 이 사람을 20세기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고 했다. 또 누구는 그를 혁명 중독자에 무자비한 도살자라고 부른다. 호오가 극단으로 갈리는 이 인물이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쿠바에서 입신양명하고 볼리비아에서 죽은 공산주의자 에르네스토 게바라다. 1928년 명문가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관상으로 보면 비틀스의 폴 매카트니와 영국 배우 휴 그랜트가 이 계열인데 영리하고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으며 독선적이다. 어려서 얻은 천식은 평생 그를 괴롭혔다. 잘 씻지 않는 습성은 이때 생긴 것으로 당시 별명이 ‘돼지’였다. 사춘기 때는 성욕을 주체하지 못했다. 첫 경험은 집안 하녀였고 그 뒤로 나이, 몸매, 얼굴을 따지지 않고 침대로 끌어들였다. 여성 친화 도련님은 책도 많이 읽었다. 간디, 네루, 포크너에서 무솔리니까지 닥치는 대로 읽었다. 무언가에 중독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천성은 이때부터 발동된 게 아닌가 싶다.

23세 때 의대 선배의 꼬임에 빠져 낡은 오토바이로 남미를 횡단한다. 그때의 기록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가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인데 20대에 보면 가슴이 벅차고 30대에 보면 지루하고 40대에 이르면 주인공들이 하도 철딱서니가 없어 끝까지 보기 힘들다. 7개월에 걸친 여행 끝에 그는 빈곤과 착취로 세상을 나누어 보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완성한다. 그런 에르네스토가 달려간 곳이 내전 직전의 과테말라였다. 그곳에서 좌익 정부의 붕괴를 목격한 에르네스토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부했고 미국에 대한 적개심과 제국주의에 대한 증오를 몸에 새긴다. 얻은 게 하나 더 있다. 최초의 법률상 아내인 일다였는데 키가 작고 포동포동한 몸매에 눈이 찢어진, 미인과는 거리가 먼 여자였다. 취향 같은 건 역시 없었다. 과테말라에서 블랙리스트에 오른 그는 멕시코로 달아났다가 피델 카스트로를 만난다. 땅 부잣집 서자 출신인 피델 카스트로가 무모하기 짝이 없는 몬타카 병영 공격 후 수감 생활을 하다 모호하게 풀려나 망명자 생활을 할 때였는데(장인이 정권의 내무부 장관) 피델의 박력 있는 말솜씨에 매료된 에르네스토는 기꺼이 쿠바 혁명에 동참을 결심한다(피델의 직업은 변호사).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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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정원 20명짜리 요트에 올라탄 82명의 혁명군은 우여곡절 끝에 17명만이 겨우 쿠바 땅을 밟는다. 이때부터 3만3000명 정부군과의 전투가 시작되고 2년 만에 수도인 아바나에 입성하는데 이 기적은 피델의 미디어 활용 능력 덕분이었다. 원정대 괴멸 소식이 퍼질 무렵 피델은 뉴욕타임스 인터뷰를 통해 혁명군의 건재를 알리고 자신을 억압받는 쿠바 인민의 희망으로 포장하는 데 성공한다. 에르네스토 역시 비슷했다. 이방인인 그가 이인자 자리를 차지한 것은 유일한 군의관이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사실은 에르네스토가 담당했던 라디오 해적 방송 때문이었다. 전투는 지지부진한데 라디오에서는 늘 혁명군이 승리하고 있었다. 방송을 통해 그는 혁명군의 대변인이 되었고 쿠바 시민권을 받아 고위 관직에 오른다. 그가 산업부 장관에 임명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가 했다는 말은 유명하다. “피델은 제정신이 아니군. 게바라 집안에서는 사업으로 성공한 사람이 하나도 없단 말이야.” 실제로 그는 경제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현장에서 노동자들과 일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를 옹호하는 분들은 그가 안락한 자리를 박차고 혁명을 찾아 떠난 것을 칭찬한다. 글쎄다. 유엔 연설에서 에르네스토는 소련이 마르크스를 잊었다며 맹비난을 퍼부었고 이에 격분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저 자식을 잘라. 아니면 원조는 일절 없다”는 말로 피델을 압박했다. 자의 반 타의 반 에르네스토는 쿠바를 떠났고 아프리카 콩고와 볼리비아에서 혁명을 기획하지만 이미 농촌 게릴라 시대는 막을 내린 후였다. 풍파 많은 한 사나이의 삶은 여기서 끝? 아니다. 지금도 전 세계 젊은이들은 누구인지도 잘 모르면서 그의 얼굴이 들어간 티셔츠를 입고 다닌다. 체포에서 사살에 이르기까지의 어설픈 관리가 그를 영원한 혁명의 아이콘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아홉 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한 에르네스토의 사후 모습은 마치 연출한 것처럼 십자가 처형 후 끌어내려진 예수와 닮았다. 이 순교자의 모습과 베레모를 쓴 형형한 눈빛의 사진이 결합하면서 그는 영원한 정치적 생명을 얻었다. 이미지는 끝없이 복제된다. 전 세계 공산주의가 다 망해도 에르네스토는 살아남을 것이다. ‘체’라는 친근한 이름과 함께.

[남정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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