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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맘껏 춤추며 뛰어노세요, 이 마법의 공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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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설치 미술가 그룹 '랜덤 인터내셔널'

'레인 룸'으로 스타덤 오른 獨 작가, 인천 파라다이스시티서 첫 개인전

첨단기술 활용한 몰입형 설치작품 "우리의 관심사는 기술 아닌 사회"

음, 역시 현대미술이로군. 겉엔 아무것도 없지만 분명 심오한 의미가 있을 테지?

전시장에 걸린 8m 길이의 텅 빈 나무 합판 앞에서 관람객이 지레짐작하는 순간, 본인의 얼굴이 합판 위에 인쇄되기 시작한다. 합판에 설치된 센서가 얼굴을 감지한 뒤, 인쇄기를 가동해 합판에 도포돼 있던 광발색성 도료에 자외선을 쫴 거대한 초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감탄도 잠시, 그림은 1분 뒤 공기 중으로 휘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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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설치미술가 ‘랜덤 인터내셔널’ 멤버 한네스 코흐(왼쪽)와 플로리안 오트크라스가 수천 개 LED 전구 다발이 빛으로 관람객의 움직임을 따라 하는 설치작 ‘Our Future Selves’ 뒤편에 섰다. /이진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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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시는 '고도로 발달한 과학은 마법과 구별되지 않는다'는 SF 세계의 격언을 떠올리게 한다. 현재 국제적으로 가장 유명한 설치미술 그룹 '랜덤 인터내셔널'의 국내 첫 개인전이 인천 파라다이스시티에서 내년 1월까지 열린다. 독일의 44세 동갑내기 한네스 코흐·플로리안 오트크라스가 2005년 결성한 이 그룹의 작업은 "기술이 야기하는 놀라움"으로 요약할 수 있다. 자외선을 뿜어내는 스프레이로 벽에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한 'Temporary Graffiti'(2005)부터 수천 개 LED 전구 다발이 사람의 움직임을 빛으로 따라 하는 'Our Future Selves'(2019)까지 전시작 10점 모두가 그러하다. 기술 개발을 위해 신경·인지과학자 등과 협업하고, 2014년부터 2년간 미국 하버드대학교 레지던시에도 참가한 이들은 그러나 "우리의 관심사는 기술이 아니다"라고 입을 모았다. "우리 관심사는 사회(society)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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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 일종의 폭우를 재현한 뒤, 센서를 통해 관람객의 몸에는 물방울이 떨어지지 않도록 설계한 대표작 ‘Rain Room’. /부산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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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이들은 "기계화돼 가는 세상에서 인간의 조건을 탐구한다"고 말했다.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 기술은 도구다. 도구에만 집중하면 진짜 중요한 것을 잃는다." '빛으로 그리는 그림'이라는 발상 역시 이 철학의 발현이다. "디지털 사진이 아날로그를 대체하며 사진이 비물질화되기 시작한 시점에 시작된 시리즈"라며 "21세기의 이미지가 지닌 덧없음의 특성을 물리적 방식으로 제시한다"고 말했다. "사막에 가봤나? 거긴 아무 소리도 없다. 그렇기에 시각에 더 집중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의 감각을 최대한으로 증폭한다. 움직임 하나, 얼굴 하나… 이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그래서 '거울'을 즐겨 사용한다. 전시장 입구에 설치된 'Audience'(2008)는 사람 머리 크기의 거울 64개를 바닥에 늘어놓은 작품이다. 물론 거울에는 기계가 달려 있고, 관람객의 움직임에 맞춰 일제히 상하좌우로 따라 움직인다. "거울은 자신과의 매우 직접적인 연결을 유도한다. 게다가 거울 속에서 관찰자는 관찰하는 동시에 관찰당한다. 기술의 발달은 '누가 컨트롤하느냐'의 문제로 나아간다. 지도자가 사람들이 뭘 하는지 다 아는 사회, 중국처럼 모든 국민이 통제되는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들의 예술관은 단순하다. "인간이 인간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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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외선 스프레이를 특수 도료가 도포된 나무 합판에 분사해 벽화를 그릴 수 있게 한 설치작 ‘Temporary Graffiti’를 한 남성이 체험하고 있다. 그림은 1분 뒤 사라진다. /아트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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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단순함의 철학은 미니멀리즘과 궤를 함께한다. 장식적 군더더기가 없다. 가장 유명한 성공 사례가 바로 'Rain Room'이다. 100㎡ 규모 전시장에는 빛과 물뿐이다. 물탱크를 설치해 빗방울이 떨어지도록 해놓고, 센서 장치를 통해 빗방울이 관람객 몸 위로는 떨어지지 않도록 설계했다. 빗속에서 사람들은 맘껏 움직이고 사색하고 키스를 나눈다. "철학적 화두를 던지려는 게 아니다. 관람객 스스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창구가 되고자 한다. entertainment(놀이)라기보다 engagement(참여)다." 이 때문에 관람객의 '반응'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한네스는 "같은 전시를 보고도 유럽·북미·아시아가 전부 다르다"고 했다. "IT가 발달한 한국·일본은 육신으로서의 인간 존재를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관람객들이 잠시라도 가상 세계에서 벗어나 자신의 동작을 마주하게 되길 바란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 등 전 세계를 돌며 흥행몰이를 했고, 내년 1월까지 'Rain Room'을 선보이는 부산현대미술관의 경우 주말마다 티켓 매진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스타가 됐으나, 시작은 초라했다. "영국 브루넬대학 유학 시절 처음 만났다. 졸업 후에는 백수였다. 그래서 직접 스튜디오를 차렸다. 팀명을 정하려다보니 '랜덤'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었다. 독일어로는 부정적 의미인데, 영어로는 긍정적이더라. 알 수 없는 무작위(random)에서 출발하는 게 예술 아닌가."

[인천=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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