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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 (수)

런던 테이트모던, 29살 백남준이 관객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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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주목한 영국 ‘백남준 회고전’】

전 세계 흩어진 대표작 200여점

타계 13주기 맞아 역대 최대 규모로

26년만에 처음 복원된 ‘시스틴채플’

현재에도 유효한 40년전 메시지까지

영상·빛 이미지로 전시실 가득 채워

2022년까지 미국 등 5곳 순회에도

한국은 전시 대상지에서 제외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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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문이 열리자 관객을 맞은 건 58년 전 지직거리는 영상 속의 미남 청년이었다. 바로 29살의 백남준(1932~2006)이 아닌가.

영상 속의 그는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이면서 얼굴을 가렸다 드러냈다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스승인 현대음악의 거장 슈토크하우젠의 기획으로 만든 이 16분짜리 영상의 제목은 <손과 얼굴>. 백남준의 등록상표인 비디오아트는 아직 구체적인 작품으로 태동하지 않은 시기였다. 흰 얼굴 위를 계속 꼬물거리며 운동하는 손가락이 인상적인 잔상으로 남는다. 그는 손짓거리를 자기 얼굴 위에서 벌이면서 무슨 생각을 품었던 걸까.

작가의 패기 넘치는 옛 영상은 찰나처럼 지나가는 이미지의 유령 같았다. 무상감을 느끼면서 시선을 돌렸더니 또 다른 진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컴컴한 옆방에서는 녹음방초 속에 점점이 박혀 빛나는 티브이(TV)가 식물들과 함께 숲을 이루고 있다. 곧 눈을 간질이며 그 광경이 다가온다. 백남준 대표작 중 하나인 <티브이 정원>(1974)이었다.

비디오아트 창시자이자 미디어아트의 전설이 된 백남준의 타계 13주기를 맞아 영국 런던의 세계적인 현대미술관 테이트모던은 이런 인상적인 도입부로 “인생은 길고 예술은 짧다”고 외쳤던 거장에 대한 오마주 전시의 서막을 열어젖혔다.

세계에 흩어진 백남준의 대표작과 주요 명품 200여점을 한자리에 모으고 의미를 꿴 역대 최대 규모의 회고전이 17일부터 테이트모던 본관 3층에서 시작되었다. 테이트모던은 2000년 템스강 가의 화력발전소를 개조해 출범한 뒤,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모마)과 함께 세계 최고 권위를 지닌 현대미술관이다. 이 미술관이 미국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과 함께 수년간 백남준의 명작 컬렉션과 아카이브를 집대성해 내놓은 것은 21세기 미술사적 사건이라고 의미를 둘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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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이미 1960년대부터 지역·국가·민족을 넘어선 초영역주의 작업들로, 분별을 거부했다. 공동 기획을 맡은 테이트모던의 이숙경 큐레이터와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의 루돌프 프릴링 큐레이터는 네트워킹을 통한 동시 연결, 동시대 접속을 구상했던 백남준의 혁신성을 주목했다. 오늘날 정보 고속도로와 인터넷, 에스엔에스(사회관계망서비스)로 이어지는 일관된 실천의 40여년 산물들을 4차 산업혁명이 다가오는 21세기에 제대로 살펴보자는 목적의식으로 회고전의 흐름은 이어진다.

12개의 방으로 이뤄진 이 전시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연대기를 택하지 않고 혁신성이 드러난 구체적 단면들을 골랐다. 초창기 무조 음악과 존 케이지의 무위의 음악, 퍼포먼스 영상, 그리고 같이했던 요제프 보이스, 샬럿 무어먼 등 지인과의 인연을 담은 작품들이 출몰하고, 아련하고 낭만적인 촛불 영상 <원 캔들>(1989)의 다기한 빛 영상이 이어진다.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건 1993년 작 영상사운드 설치작품 <시스틴 채플>(시스티나 성당)이었다. 1993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독일관 출품작으로 최고상(황금사자상) 받은 뒤 26년 만에 처음 복원됐다. 마지막 방의 안쪽 큰 공간에 대형 격자형 구조물을 놓고 30대 넘는 비디오프로젝터로 잡다한 자연, 인공 문명과 몽골 사람들의 제의 모습 등을 담은 영상을 천장과 사방으로 투사해 20세기판 시스티나 성당 벽화를 구현하려 한 대표작이다. 1964년 와이어, 나무, 폼 등으로 만든 첫 로봇 작품인 <로봇 K-456>은 4번 전시실에서 50년 만에 런던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미술관이 <시스틴 채플>과 더불어 전시의 하이라이트로 추천하는 작품이다. 일본인 기술자 슈야 아베와 처음 같이 디자인한 로봇으로, 그는 이 로봇을 나중에 뉴욕 거리에서 움직이게 하다 차에 치이게 하는 기행을 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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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의 네번째 방 `실험: 기술과 참여' 안쪽 구석에 있는 1969년작 <참여 티브이>도 곱씹으며 보는 재미가 있다. 2001년 다시 만든 이 작품의 카메라 앞 무대에는 몸짓을 실연하려는 관객의 줄이 늘어섰다. 스펙터클한 이미지의 난장을 펼친 작품은 아니지만, 지금도 여전히 유용한 참여예술의 모델을 예시한 명작이다. 3개의 폐회로카메라가 붉은색, 파란색, 초록색의 색감을 지닌 영상으로 무대에 나온 관객의 몸짓을 비춰 보여주는 쌍방향 소통 예술의 선구적 작품이다.

이번 회고전은 흔히 요란스럽고 변덕스러운 비디오아트 재주꾼으로 기억되는 백남준이 실제로 현실의 정치와 세속의 흐름에도 거리를 두고 반응하면서 깊이 있는 비판의식을 작품에 깔았다는 사실도 일러준다. 5번 방의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텔레비전 이미지를 마그네틱 코일을 통해 뒤틀고 왜곡된 상으로 보여주는 <닉슨>, 기름 깡통과 장난감 바퀴로 만든 <캔카>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테이트모던은 2014년 기증받은 두 소장품을 주요 작품으로 내놓았다. 11번 방의 <원 캔들>은 하나의 촛불을 여러개의 카메라로 비춰 벽에 투사하면서 1천개의 달이 강을 비춘다는 월인천강의 불가 이야기를 색다르게 풀어낸 발굴 작품이다. 하나의 촛대가 수많은 중생의 빛이 될 수 있다는 선불교의 아이디어가 테크놀로지와 만나 어떤 울림을 빚어내는지에 대한 거장의 깊은 고민을 느낄 수 있었다.

전시는 내년 2월9일 끝난다. 그 뒤 2022년까지 공동 주최 기관인 미국 샌프란시스코 미술관과 시카고 미술관, 싱가포르 내셔널 갤러리 등 유럽, 미주, 아시아 5개 미술관을 순회한다. 한국은 작가의 모국이고 적잖은 컬렉션을 갖고 있는데도 테이트 후원사인 현대자동차가 후원자로 자동 참여한 것 말고는 연관된 것이 없다. 백남준의 저작권을 승계한 맏조카이자 회고전 기획 막후에서 영향력을 미친 켄 백 하쿠타(백 건)와 한국 미술계의 불화가 풀리지 않은 것이 배경으로 지목된다. 16일 열린 브이아이피(VIP) 전시 사전 공개 행사장에서도 백남준과 생전 교류했던 국내 미술계 주요 인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런던/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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