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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편집국에서] 외치를 위한 내치 / 이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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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이용인
국제뉴스팀장


특정 국가의 핵심적인 외교 자산 가운데 하나는 최고지도자의 국정 지지율이다. 국방력, 경제력, 소프트파워 등이 외교력의 근본 토대라면, 국정 지지율은 단기적으로 국가의 협상력을 떠받치는 보이지 않는 자산이다. 내치를 위한 외교도 필요하지만, 외치를 위한 국내 정치의 안정이 필요한 까닭이다.

각 나라의 국내 사정과 정치체제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외교는 국내 정치에 상당히 종속적이다. 그래서 내치를 위한 외교, 즉 최고지도자의 국내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외교를 활용하고 싶어 하는 유혹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도자들한테 공통적이다. ‘외교 행사’는 비교적 손쉽게 점수를 올리는 데 유용하다.

한국에서도 대통령이 외국 순방을 하고 오면 지지율이 작든 크든 대체로 오르는 경향이 있다. 언론의 집중 보도를 통해 화려한 의전과 한국의 대표선수로 대접받는 이미지 등이 국민에게 각인된다. 여기에 ‘외국에서 고생하는’ 혹은 ‘세일즈하는’ 등의 ‘마사지’가 더해진다.

외교를 내치의 종속변수로 지나치게 결속시키는 것엔 찬성하지 않지만, 외교 행사에 대한 ‘마사지’가 도를 넘지 않는다면 크게 나무랄 일은 못 된다. 물론 지지율이 낮을수록, 내치가 불안할수록 좀 더 강하게 마사지하고 싶어 하는 당국자들의 욕구가 생기고, 때로는 무리수를 둬 역풍을 맞지만 말이다.

‘협상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거꾸로 내치가 외교의 성과에 영향을 미친다. 외교에서 일방적 승리란 없다. 상대방의 외교적 패착으로 완승을 얻어도 상대국 내부의 강한 반발을 불러 오래 지속되지도, 잘 지켜지지도 않는다. 2015년 한·일이 맺은 ‘12·28 일본군 위안부 합의’가 국내의 강한 반발로 폐기된 사례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외교적 합의가 오래 지속되려면 ‘불계승’이 아니라 ‘반집승’이 돼야 한다.

‘반집승’을 목표로 하더라도 합의에 이르려면 양보를 해 줘야 한다. 언론과 여론은 ‘왜 불계승을 못 했느냐’며 힐난할 것이고, 최고지도자가 국내 지지율이 떨어지는 것을 감수하고라도 이를 방어할 수밖에 없다. 양국 간 외교적 합의에 최고지도자의 ‘결단’이 중요하다는 설명이 붙는 것도, 합의에는 정치적 자산의 감소를 수반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치가 흔들리면 결단을 내리기 힘들고 외교가 힘을 받지 못한다.

또한 지지율이 낮으면 협상가들의 자신감도 떨어지고, 상대국 협상가들도 ‘언제 뒤집힐지 모르는’ 합의에 서명하는 것을 주저하게 된다. 언론매체 인터뷰 등을 통해 상대쪽 여론을 분열시키기도 한다. 미국이 흔히 구사하는 기법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대한 하원의 탄핵 조사,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이 불확실해지는 상황을 봐도 국내 정치가 외교에 미치는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이란핵협정을 일방적으로 탈퇴하고 나선 뒷수습은 못 하고 있는 트럼프는 지난 9월 유엔 총회 때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을 만날 수도 있다며 추파를 던졌다. 하지만, 이란은 제재를 먼저 해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지난 10~11일 열린 미-중 고위급 무역협상의 ‘스몰딜’(부분합의)은 기껏해야 확전을 막기 위한 현상유지 수준이다. 궁지에 몰린 트럼프 대통령을 상대로 중국이 ‘지연 전술’을 쓰지 않는다면 그게 되레 이상하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도 섣불리 ‘통 큰 행보’를 내딛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국내로 눈을 돌려보면, 내년 상반기까지 이어질 외교적 협상들을 앞둔 상황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의 지지율이 큰 폭으로 떨어졌다. 현재의 한-일 관계 기조를 현 정부 임기 말까지 끌고 가는 것은 정권에 적잖은 부담이다. 어떤 식으로든 강제동원 노동자 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 간 협의가 필요할 텐데, 한국이 일방적 승리를 거두기 어려운 구조다. 지지율이 떨어질 수도 있는데 정치자산은 부족하다.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협상도 난제다. 미국은 보수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방위비 대폭 인상 여론을 조성할 것이다. 북-미 협상 재개는 불확실하고, 재개되더라도 롤러코스터를 탈 것이다. 게다가 우리가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는 북-미 협상은 양날의 검이다. 외치를 위해서도 내치는 정말 중요하다.

yy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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