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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죽어서도 꿈꾼 풍요과 권세…신라인이 그린 사후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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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경주 쪽샘지구 44호묘에서 출토된 토기에 새겨진 행렬도


말을 탄 인물과 말들, 그 뒤를 따르며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다. 이어서 활을 든 인물들이 사슴, 멧돼지, 호랑이 등으로 추정되는 동물들을 사냥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사냥 장면 뒤의 말을 탄 인물은 가장 크게 묘사되어 있다.

경주 쪽샘지구 44호묘에서 깨진 조각으로 출토된 ‘선각문 장경호’(線刻文 長頸壺)에 그려진 그림이다. 조각을 맞춰보니 기마, 무용, 수렵 등의 장면으로 구성된 행렬도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그림이 장의 의례에 쓰인 토기의 문양이라는 점이 특별히 주목된다. 신라인들의 ‘계세적 내세관’(생전의 풍요로운 삶이 죽음 이후에도 이어지길 바란 사후 관념)이 드러난 첫 사례로 보이기 때문이다. 같은 인식을 반영한 고구려 고분벽화의 행렬도가 있어 44호묘가 조성된 5세기 무렵 신라, 고구려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도 평가된다.

◆“가장 회화성이 우수한 토기 문양’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16일 경주 쪽샘지구 44호 적석목곽묘 발굴조사를 통해 행렬도가 새겨진 선각문 장경호를 비롯해 제사와 관련된 유물 110여 점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높이 약 40㎝로, 5세기 중후반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장경호는 무덤 주변의 제사 흔적에서 발견됐다. 장경호는 목 부분에서 몸통 부분까지 4단으로 무늬를 새겼는데, 행렬도는 세번째 단에 해당하는 어깨 부분에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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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마행렬 문양


행렬의 선두에는 말을 탄 인물과 말 두 마리가 있다. 말은 갈귀를 의도적으로 묶어 뿔처럼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연구소 관계자는 “갈귀를 뿔처럼 묘사함으로써 신령스러운 동물처럼 그리려 한 것 같다”고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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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추는 장면


바지, 치마 차림으로 춤을 추는 사람들의 모습은 고구려 고분 무용총의 무용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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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을 들고 동물을 사냥하는 장면


수렵 장면에는 활을 든 인물들이 동물을 사냥하고 있다. 화면 하단에 표현된 기하문은 산(山) 혹은 나무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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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크게 묘사된 주인공


그림에 가장 크게 묘사된 말을 탄 인물은 행렬의 주인공으로 추정된다. 이 사람 뒤로 개로 보이는 동물이 따르고 있다.

연구소는 “행렬이라는 큰 주제를 바탕으로 무용, 수렵의 내용까지 포함된 것은 신라 회화 관련 자료 중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라며 “지금까지 발견된 어떤 선각문 토기보다 회화성이 우수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죽어서도 현새의 부와 지위 그대로이길’, 신라인의 내세관

장경호 행렬도의 의미를 밝히는 데는 고구려 고분벽화 속 행렬도가 참고가 된다. 장경호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5세기 무렵은 광개토대왕이 5만 여명의 군대를 보내 신라를 침입한 왜군을 격파한 이후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이 강했다. 울산대 전호태 교수는 “고구려가 신라를 반쯤은 지배하던 시절이어서 신라에 고구려의 문화가 많이 전해졌다”며 “장경호의 행렬도 역시 고구려 고분벽화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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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안악3호분의 벽화 중 행렬도 부분


행렬도는 4세기에서 5세기 전반까지 평양, 안악 지역의 고분에서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다. 행렬도를 포함한 고분벽화는 대체로 무덤 안을 생전에 살았던 화려한 저택으로 묘사하며 시중을 드는 시종, 부하 관리, 연희 장면 등이 포함된 생활풍속을 주제로 한다. 무덤의 주인을 다른 등장인물보다 크게 그려 신분적 위계를 표시하는 것도 특징이다.

대표적인 것이 ‘동수’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안악3호분이다. 안악3호분에는 방앗간, 외양간 등을 갖춘 대저택과 남녀 시종, 호위무관, 무용수 등과 함께 250여 명이 표현된 대행렬도가 그려져 있다. 무덤의 주인과 그의 부인은 시종들의 시중을 받고 있는데, 다른 어떤 인물들보다 크게 묘사했다. 생전에 누렸던 지위와 부를 내세에서도 향유하기를 바라는 희망을 표현한 것이다. 이런 내세관은 고구려 뿐만 아니라 이집트 벽화, 그리스 신화에서도 확인되는 인류 공통의 관념이다. 전 교수는 “생활풍속계의 고분 벽화는 현생의 삶을 약간 더 업그레이드 시키는 형태로 표현되는데 장경호의 행렬도도 비슷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며 “신라인들의 내세관을 이처럼 풍부하게 표현한 사례는 지금까지 없었다”고 설명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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