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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Focus 인사이드] 태국 군대가 한국에 유엔군 파병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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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군대 22년 동안 한국에 주둔

2차세계대전 독일·일본 같은 편

한국전쟁 유엔군 참전해 오명 씻기

최초·마지막 부대장은 '부자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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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태국군의 철군 행사 모습. 태국군은 미군 다음으로 가장 오랫동안 한국에 주둔했다.[영상캡처= 행정안전부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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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6월 21일, 당시 용산에 위치한 유엔군사령부 구내에서 작지만 성대한 행사가 벌어졌다. 병력이 157명에 불과한 1개 중대가 행사의 주인공이었지만 국무총리, 유엔군사령관, 태국군 총참모장, 주한 태국대사 등의 VIP들이 대거 참석했을 만큼 의미가 상당했다. 한국전쟁으로 한반도에 발을 디디며 우리와 인연을 맺은 주한태국군의 철군식이 열렸다. 그렇게 전투부대로서 태국군의 한국 주둔사는 막을 내렸다.

태국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유엔이 회원국들에게 파병을 요청했을 때 미국 다음으로 빨리 응했던 나라다. 당시 태국은 제2차 대전 중 추축국에 가담했던 업보로 말미암아 국제 사회에서 따돌림받고 있었기에 파병을 서방과 가까워질 호기로 보았다. 최정예인 제21연대의 파병을 결정하고 한창 준비 중이던 10월 말이 되었을 때 종전이 예상되자 병력은 1개 대대 규모로 대폭 축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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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유엔군 행사에 등장한 태국군 의장대원 (흰색 모자 , 붉은색 상의). 1972년 전투부대는 완전 철군했으나 극소수의 병력이 여전히 남아 있다. 아직도 유엔군이 다국적 연합군임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 중 하나다 . [미 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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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들이 보름간 항해 후 11월 7일 부산에 도착했을 때는 중공군의 참전으로 상황이 완전히 바뀐 상태였다. 이후 3년 동안 태국군은 전쟁 중 3650명이 참전하여 전사 129명, 부상 1139명의 희생을 감내하며 우리를 도왔고 이후 22년간 주둔했다. 그런데 현재에도 태국군은 소수의 의장대원을 유엔군사령부에 파견하고 있다. 이는 유엔군이 여전히 다국적 연합군임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당시 우리 정부는 태국군의 철군을 만류했지만, 군사적으로 공백을 야기하기에는 의미가 없는 한 개 중대였으므로 1년 전에 있었던 미 7사단의 철군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더구나 1개 군단 규모의 주월한국군이 조만간 복귀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런 군사적 미미함과 달리 주한태국군의 철군이 내포한 상징적 의의는 상당했다. 전투부대로서 유엔군의 사실상 해체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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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도착 직후인 11월 20일 대구에 위치한 UN군 보충대에서 현지 적응 훈련 중인 태국 제21연대 병사들. 처음 겪는 한국의 겨울에 엄청난 고생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전쟁기념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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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은 1950년 6월 27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따라 구성된 다국적군이다. 유엔은 평화 유지에 실패하며 제2차 대전을 막지 못한 국제연맹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적극적으로 군사 개입에 나섰다. 이렇게 연합군 결성이 성사되자 유엔의 요청에 따라 16개국이 전투부대를, 5개국이 의료지원단을 파병했다. 이들 모두는 유엔군사령부의 지시를 받았다.

대다수 파병국 부대들은 단독 작전을 펼치기 곤란한 규모여서 미군에 배속되어 활동했지만, 미군도 형식상으로는 유엔군사령부의 통제에 있었다. 1950년 7월 14일, 정부가 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하면서 국군도 지휘를 받았다. 그러나 1991년까지 우리나라는 유엔 회원국이 아니어서 성격이 조금 달랐다. 그래서 태국군의 철군은 유엔군사령부가 다국적군 지휘부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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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캠프 험프리스에서 열린 '유엔군 사령부 미디어데이'에서 유엔사 부사령관 웨인 에어 중장이 유엔사 소개를 하고 있다. 미군 이외 최초의 유엔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부임했다. 2019년 후임으로 역시 미군이 아닌 호주군의 스튜어트 마이어 중장이 부임했다. 유엔군사령부의 재활성화의 목적으로 보고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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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에도 유엔군사령부가 존속 중이나 1978년 창설된 한미연합사령부에 전시작전통제권을 넘긴 이후 정전과 관련한 임무만 담당하는 행정기구가 되었다. 그래서 북한은 미군이 유엔의 이름을 빌려 주둔하고 있다며 유엔군사령부의 완전 해체를 주장하는 중이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미국이 유엔군사령부의 재활성화에 적극적이다. 유엔사가 한국전 참전국으로부터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기능이 아직 있어서다. 전작권 환수와 관련해 의견이 분분한 편이어서 앞으로의 변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처럼 유엔군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차지했던 주한태국군의 시작과 끝과 관련해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최초 파한 부대를 이끈 이는 보리분줄라짜릿 대령이다. 그런데 22년 후 마지막 부대장이 그의 아들인 음삭줄라짜릿 소령이었다. 보리분 대령이 처음 한국에 발을 내려놓았을 때 22년 후 아들이 부대를 이끌고 한국을 떠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우리나라와 줄라짜릿가문의 재미있고도 고마우며 질긴 인연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남도현 군사칼러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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