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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입시 개편을 넘어](2)고교 교실 ‘입시 준비 장소’로 전락…공교육 살리는 대입 개편으로 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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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 학교 수업 집중하기보다

알아서 ‘대학별 전형’ 준비 바빠

교사 절반 “공교육 정상화 중요”

경향신문

“수업을 잘 안 들어서 모르겠어요.”

수도권 일반고등학교 3학년인 ㄱ군(18)은 참여형 수업에서 기억나는 것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 내신 성적은 “1학년 때 벌써 망했다”고 말했다.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이나 학생부교과전형으로는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2학년 때부터 혼자 수능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국어·영어·수학 등 주요 과목 위주로 학원에 다니고 독서실 이용권을 끊어서 자습을 했다.

수능 준비를 시작한 뒤 학교 수업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토론하고 발표하는 수업이 더러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수업을 잘 듣지 않아 기억에 남는 것은 없다. ㄱ군은 “이과 수능 준비에 도움이 되는 수학 외의 과목은 수업을 거의 듣지 않았다”며 “3학년 2학기 말 들어서는 학교 수업시간에 EBS 연계 교재 문제풀이를 해줘서 수업을 듣고 있다”고 했다.

같은 학교 3학년인 ㄴ양(18)은 대입을 수시 위주로 준비해왔다. 최상위권 성적은 아니지만 학교생활을 열심히 했더니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에 기술할 내용이 꽤 있었다. 그는 “ ‘독서와 문법’ 시간에 낙태죄와 관련된 책을 읽고 쓴 보고서, 학급 부회장을 맡았던 경험, 친구와 짝을 지어 했던 멘토링 활동을 자기소개서에 썼다”고 말했다.

아쉬운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학생부에 기재할 수 있는 교내 상장은 대부분 공부 잘하는 친구들에게 돌아갔다. ㄴ양은 “선생님들은 성적이 다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공부 잘하는 아이들만 예뻐하고 상장 같은 것을 몰아준다”고 말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일반고에서는 학생부를 채울 활동이 특목고나 자율형사립고 학생들에게 밀린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는 “사실 1학년 때는 아이들이 다 열심히 하는데 2학년 때부터 자신이 지원할 입시 전형이 어느 정도 정해진 후에는 거기에 맞춰서 학교생활을 한다”고 말했다.

입시 위주로 돌아가는 공교육의 현주소다. 학교생활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과정으로만 여겨진다. 교육기본법은 학교교육의 지향점을 ‘학생의 창의력 계발 및 인성 함양을 포함한 전인적 교육’이라 명시하고 있다. 전체 29개 조항으로 된 법 어디에도 ‘입시’란 단어는 없다.

공교육은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대입 개편을 논의하면서 공교육 문제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다. 지난달 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고등학교 교사 조합원 2476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대입제도 개선 방향에서 가장 중시되어야 할 것’으로 응답자의 절반에 가까운 49.3%가 ‘공교육 정상화’를 꼽았다.

■ “자사고 폐지, 하향 평준화” 반론 꺾을 공교육 개선책 나와야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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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층 격차가 대입 결과를 좌우하는 교육 불평등 현상이 만연해 있고, 학생부종합전형(학종) 논란에서 드러났듯 학교에도 사교육이 개입할 여지가 많다는 점에서 공교육 정상화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왜곡된 공교육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것도 오직 공교육뿐이다. 100%에 가까운 고교 진학률을 보이는 대한민국에서 학생들이 ‘똑같이’ 하루 8시간씩 교육을 받는 곳은 학교밖에 없기 때문이다.

■ “학종이 그나마 학교 살려”

입시가 중등교육의 최종 목표가 돼버린 탓에 입시제도의 변화는 곧 학교의 변화로 이어진다. 대다수의 일선 교사들은 공교육 정상화에 기여할 수 있는 대입 전형이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 중심의 수시 전형이라고 말한다. 현 고2가 적용받는 ‘2015 교육과정’ 역시 참여형 수업 확대와 과정중심평가 강화 등 3년간의 고등학교 생활 과정을 평가하도록 설계돼 있다.

학교 변화, 입시와 연계

전교조 조합원 설문 결과

공교육 강화를 위한 전형

생활기록부 중심의 수시

목표형 수업 반영한 학종

“아이들이 성취감 느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의 설문조사에서도 ‘공교육 정상화를 위해 확대돼야 할 전형’으로 내신 중심의 ‘학생부교과전형’과 학생부 중심의 ‘학종’이 각각 37.6%, 32.3%의 비율로 1·2위를 차지했다. 수학능력시험(23.1%), 대학별고사(2.3%), 특기자전형(0.4%) 등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한 사립대학 입학사정관은 “입학사정관제 도입 초기 몇몇 학교들을 다녀보니까 아이들이 다 엎드려 자고 있더라. 선생님들이 깨어 있는 2~3명을 대상으로 수업을 했다”며 “당시엔 어차피 다 수능으로 뽑으니 낮에는 학교에서 푹 쉬었다가 밤이 되면 학원으로 가는 것이었다. 다시 수능으로 돌아가자고 하면 교사들이 끔찍해 한다”고 말했다.

다양한 진로 탐색 문 열고

참여형 수업 활동 늘리되

교사에 부담 전가는 안돼


안혜정 서울 휘봉고등학교 교사는 “논란과는 달리 학종이 공교육 정상화에 그래도 기여를 많이 했다”고 말한다. 고등학교에서 진로진학 과목을 맡고 있는 그는 올 여름방학 기간 학생들과 ‘도전 4주 프로젝트’라는 목표형 수업을 진행했다. 학생들이 방학 동안 ‘도전’하고 싶은 것에 대해 직접 계획서를 만들고, 실행 결과를 보고서로 작성해 제출하는 수업이다. 매주 시사 칼럼을 읽고 영어 에세이를 쓴 학생, 매주 한 권씩 책을 읽은 학생이 있는가 하면 건강을 위해 다이어트를 하거나 ‘몸짱’을 목표로 근육을 키운 학생도 있었다.

안 교사는 “목표형 수업은 그 자체로 완결된 구조를 갖고 있어서 아이들이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며 “마지막에 대학을 가느냐 마느냐로 고등학교 3년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작은 성공을 통해서 아이들의 역량이 키워지고 자존감도 높아진다”고 했다. 그는 “정시 비율이 높아지면 학교는 대입의 도구가 되고 학생들의 적성을 고려하는 수업을 할 수 없다”며 “실제로 수능을 앞둔 고등학교 3학년 교실은 본래 교육과정을 무시한 채 EBS 문제집을 풀고 ‘킬러 문제’를 맞히는 요령을 가르치는 등 파행을 겪는다”고 밝혔다.

■ 자사·특목고 등 폐지해야

공교육 강화의 출발선으로 꼽히는 게 특수목적고와 자율형사립고 폐지다. 우수학생들이 몰리면서 특목·자사고는 ‘우수고’, 일반고는 ‘열등고’로 낙인찍히면서 일반고가 황폐화되는 데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서울 신현고등학교 김현 교사는 “고교서열화가 안됐을 때는 수업을 열심히 듣는 똑똑한 아이들을 다른 아이들이 어깨 너머로 따라왔다”며 “소위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다 특목고로 빠지고 나면 나머지 아이들과는 수업을 하기 굉장히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고교서열화를 한 번 경험한 아이들은 굉장한 열패감을 갖고 있고 의지가 없는 아이들도 많다”며 “아이들을 하나하나 일으켜 세우는 일이 힘들다”고 밝혔다.

일반고에 비해 등록금이 평균적으로 3배가량 높은 특목·자사고 자체가 교육 불평등 현장이라는 지적도 있다. 국회 교육위원회 정의당 여영국 의원이 지난 8일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자사고 연간 학비 현황’에 따르면, 2018년 기준 자사고의 학부모부담금은 평균 886만4000원이었다. 특목고인 사립 외고의 학부모부담금은 평균 1154만원, 사립 국제고는 학비가 최대 1800만원에 달했다.

송인수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대표는 “이번 조국 법무부 장관 사태를 통해 부모의 사회·경제적 영향력이 월등한 계층의 자녀들이 특별한 학교 유형에 집중되면서 대입과 그 이후까지 영향을 주며 기득권을 대물림하는 것으로 드러났다”며 “자사·외고를 일반고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자사고와 특목고 등을 일괄 폐지하는 방안을 검토 중에 있다.

■ 일반고 경쟁력 강화 대책 필요

자사·특목고 폐지를 시행하려면 ‘일반고로의 하향평준화’라는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는 수준의 공교육 개선책이 나와야 한다. ㄷ군은 올해 대입에서 의상학과를 목표하는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다. 일반고의 교과에는 의상학과 지망에 도움이 될 진로 활동을 할 만한 정규 교육과정이 없다. 패션 동아리도 학교에 없어서 스스로 만들까 하다가 관뒀다. 따로 디자인 관련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학생부에는 자격증을 못 쓰게 하는 규정이 있어 쓰지 못했다. 면접에서 별도로 준비한 계획서(포트폴리오)를 제시할 생각이다. ㄷ군은 “외부에서 활동한 것을 학생부에 못 쓰게 하려면 학교에서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돼야 하는데 아쉽다”고 말했다.

2025년 전면 도입 예정인 고교학점제도 지역 격차를 해소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대도시의 경우 개별 학교가 어려우면 거점이나 지역별로 고교학점제를 시행하는 게 가능하지만 농어촌 지역은 학생 부족, 교사의 근무 기피, 교통여건 열악 등 여러 제약으로 인해 거점 구성 자체가 어렵다.

일선 현장에서는 공교육 강화에 따른 부담이 교사에게만 전가되는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 공립 일반고 교사는 “참여형 수업을 하려고 하면 수업 준비부터 학생 지원, 평가 등 그 모든 과정을 챙기느라 집에 늦게 들어간 일이 많다”며 “공교육이 정상화되려면 몇몇 선생님의 ‘기적적인 노력’에 기대서는 안될 것”이라고 밝혔다.

현행 교육과정에 사교육이나 부모의 개입 여지를 막는 노력도 필요하다. 수행평가만 해도 교육부 원칙은 수업 시간 내에 하도록 하는 것이지만, 그런 원칙을 어기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학부모 ㄹ씨는 “수행평가의 경우 기본적으로 인터넷이든 설문이든 조사가 필요한 것이 많은데 수업 시간에 다 하기 어려우니 결국에는 집에 가져오고 남의 손을 타게 된다”고 지적했다. 학부모 ㅁ씨도 “과목에 따라 수행평가가 50% 이상 들어가고 학생부에도 기재되니 사실 비교과랑 똑같다”며 “아이들 혼자 하면 점수를 더 적게 받으니 학원이나 학부모의 도움을 받게 된다”고 말했다.

박채영 기자 c0c0@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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