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08 (수)

[여적]불쏘시개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호모에렉투스가 불을 이용한 142만년 전부터 인간과 동고동락한 말이 있다. 쉽게 불이 붙도록 먼저 태우는 ‘불쏘시개’다. 돌을 튕기고 나뭇가지를 문질러 불붙이던 선사시대엔 낙엽·풀·잔가지·털·관솔이, 문명시대엔 종이·지푸라기·영지버섯이, 지금은 번개탄·기름도 그 역할을 한다. 동해안 산불에서 300m를 날아다닌 솔방울도, 노트르담성당 불길을 키운 지붕 밑 800년 된 참나무도 사람들은 불쏘시개라고 했다. 인터넷에 불쏘시개를 치면 기사 44만건이 뜬다. 도화선·촉매·신호탄·마중물과 비슷한 말인데, 불로 비유하는 인간사가 유독 많고 널리 알려진 순우리말의 멋스러움도 더해졌을 터다.

불쏘시개는 정치적으로 변화의 촉발점에 쓰인다. YH사건→김영삼 의원직 박탈→부마항쟁→10·26으로 이어진 유신 말기 사건은 연쇄적으로, 1990년 지방자치제를 연 김대중 전 대통령 단식에도 이 제목이 뽑혔다. 일찌감치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2000년의 동교동 권노갑, 2012년의 친박 허태열, 올해 이해찬·양정철은 물갈이의 십자가를 자임했다. 4차례나 험지에서 지역 벽에 도전한 ‘바보 노무현’도 불쏘시개로 불렸다. 꼭 의도한 것만 있는 것도 아니다. 2003년 9월4일 민주당 당무회의에서 일어난 ‘이미경 의원 머리채’ 사건은 그날만 의원 31명이 탈당계를 낸 분당의 불쏘시개가 됐다. 두번 구속된 안희정은 2002년엔 정치자금 투명화, 올핸 미투(MeToo)의 불길을 댕겼다. 트럼프·김정은이 주고받은 친서가 비핵화 협상을 촉발시킬 때도, 담뱃세·금리·온실가스·동남권신공항이 세상 이슈가 될 때도 곧잘 따라붙는 말이 불쏘시개다.

조국 법무장관이 14일 “검찰개혁을 위한 불쏘시개 역할은 여기까지”라며 물러났다. 66일간 대한민국 뉴스 중심에 섰던 사람의 사퇴 변에 불쏘시개가 소환된 것이다. 조 장관은 지난 1일 출석한 국회에서도 “제게 주어진 시간까지 제 일을 하고자 한다. 불쏘시개 역할이면 충분하다”고 했었다. 그 분기점을 정부 몫 검찰개혁안이 발표된 날로 잡은 셈이다. 불쏘시개는 야당이 대통령에게 요구한 ‘읍참마속’과 동전의 앞뒷면이다. 겸손한 표현이지만, 더 큰 태풍을 예고하는 말일 수도 있다. 조국이 불쏘시개가 된 촛불은 검찰개혁과 공정사회였다.

이기수 논설위원

최신 뉴스두고 두고 읽는 뉴스인기 무료만화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