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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1 (토)

[서소문 포럼] 구미공단 50년, 누가 성공 신화에 이념을 덧씌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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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오영환 지역전문기자


폐교(廢校)는 고도 성장기의 단면을 간직하고 있었다. 구미시 제1 국가산업단지 코오롱인더스트리 내 오운여상. 2층 건물에 난방시설을 갖춘 교실과 시청각·음악·미술실…. 1970~80년대 농어촌 일반 중·고 시설을 웃도는 산업체 부설학교지만 복도 게시판은 한가지였다. 충효를 강조하는 손글씨 액자가 걸려 있었다. 1979년 개교해 2000년 문 닫을 때까지 배출한 졸업생은 3116명. 주·야간 3교대 근무로 오전 또는 오후 반에서 하루 4시간씩 공부했던 소녀 근로자들의 애환은 끝이 없다.

“보리 이삭 줍던 시골 아이가 오빠 등록금 벌러 열일곱 마른버짐 핀 얼굴로 백 리 밖 구미공단에 내려섰습니다. 첫 월급 6700원. 편지 속에 넣어 집으로 보내고 처음으로 환하게 웃은 그 날을 잊지 못합니다.”(1회 졸업생 배계화씨).

“이젠 전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17살의 가장으로서 생활만을 계획하고 뛰어갑니다. 오늘도 밤을 낮 삼아 생산하는 저의 일터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향해 갑니다.”(16회 졸업생 수기)

공장을 나서니 500m가량 떨어진 로터리에 우뚝 솟은 높이 40m의 수출산업의 탑이 학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탑은 75년 구미공단 수출 1억 달러 달성을 기념해 이듬해 세운 구미의 랜드마크다.

코오롱은 구미공단(구미국가산업단지) 섬유업계 입주 1호 기업이다. 69년 9월 건설부의 구미공단 인가 직후 착공돼 1년여 만에 준공됐다(당시 한국폴리에스텔). 창업주는 우리나라에 처음 나일론을 들여온 오운(五雲) 이원만이다. 일본서 사업을 하다 귀국한 오운은 구로공단의 산파역이기도 하다. 재일동포의 투자를 끌어냈다. 당시 나일론은 의생활 혁명을 일으켰다. 수출의 일익도 맡았다. 나일론은 남북 간 명암도 가른 한 요소였다. 북한은 석유가 원료로 세계 표준인 나일론 대신 석탄서 뽑는 비날론(주체 섬유) 개발로 치달았다. 비날론은 전기와 생산비가 더 든다.

73년까지 조성된 1단지는 전자·섬유업체가 양대 축이다. 코오롱 공장 바로 맞은 편이 전자업체 1호인 KEC다. 역시 일본서 귀국한 기업인 곽태석이 세운 반도체 업체로 한국도시바가 전신이다. 당시의 반도체 공장은 전자산업 불모지 한국에 신선한 충격이었다. 공단은 2·3·4·5단지를 조성하면서 한국 전자·전기 산업의 메카가 됐다. 지난해 말 현재 공단 규모는 약 3000만㎡로 가동업체는 1980개사, 고용 인원은 9만여명이다.

그새 공단의 주력 산업은 바뀌었다. 섬유·전자·백색가전에서 디스플레이·모바일·스마트기기로 중심축을 옮겼다. 경박단소(輕薄短小)형 산업이 대세가 됐다. 공단은 내륙의 최대 수출기지다. 99년에 수출 100억 달러를, 2005년에 300억 달러를 돌파했다. 첨단 전자산업 육성과 수출은 박정희 대통령이 그렸던 공단의 청사진이다. 수출은 지난해 259억 달러로 대기업의 해외·수도권 이전 영향을 받는 추세다.

구미공단이 지난달 50주년을 맞았다. 공단은 한국 근대화의 상징이자 산업 발전의 궤적이다. 성공 신화는 정·재계 지도자의 예지와 혼, 근로자의 땀과 눈물, 꿈이 빚어냈다. 공단에 얽힌 개개인의 스토리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이런 공단을 두고 구미시가 얼토당토않은 50주년 홍보 영상을 만들었다. 김대중·노무현·문재인 대통령만 등장시켰다. 공단의 설계사를 빼고 정치 진영의 한쪽만 넣은 영상은 차라리 한편의 코미디다. 제작 업체의 실수라고 해명하지만, 결과물은 진영 논리가 뚜렷하다. 마침 장세용 구미시장은 더불어민주당 소속이다. 역사는 특정 세력의 전유물이 아니다. 산업의 금자탑에 이념을 덧씌우기 시작하면 미래는 없다.

오영환 지역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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