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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4 (화)

[설왕설래] 홍콩 ‘엑소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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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정무문’, ‘영웅본색’, ‘천녀유혼’, ‘동방불패’, ‘중경삼림’….

40대 이상 중장년 남성들은 누구나 어린 시절 한두 편 이상의 홍콩 누아르와 무협영화를 본 추억이 있을 듯하다. 홍콩은 1970∼90년대에 동양의 할리우드로 불리며 아시아인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했다. 잘나가던 홍콩 영화는 1997년 7월 홍콩의 주권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넘어가면서 암흑기를 맞는다. 서극, 오우삼, 임영동 등 유명 감독과 성룡, 주윤발, 이연걸 등 많은 스타가 할리우드로 떠났다. 당시 영화인들은 중국공산당의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 약속을 의심했고 표현의 자유가 제약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그 시절 캐나다·호주·미국 등 해외로 나간 홍콩 주민은 30만명에 이른다.

그로부터 22년이 흐른 지금 다시 홍콩에 ‘엑소더스’ 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 6월 초 ‘범죄인 인도법안(송환법)’ 반대에서 촉발된 홍콩 시위의 불길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는 탓이다. 당장 홍콩 부자들이 좌불안석이다. 최근 두 달 새 홍콩의 백만장자 100여명이 아일랜드에 투자이민을 신청했다고 한다. 아일랜드는 100만유로(약 13억원)를 투자하면 영주권을 주는 곳으로 이전에는 이민 문의가 없었다. 이미 상당수 부자가 대만과 캐나다, 포르투갈 등 해외로 떠난 것으로 전해진다. 8월에만 30억∼40억 홍콩달러(약 4500억∼6000억원)가 홍콩에서 빠져나갔다. 사이클 경기와 와인 축제 등 각종 국제행사까지 줄줄이 취소되는 판이다.

홍콩 당국이 지난 5일부터 ‘복면금지법’ 등 영국 식민통치 시절의 유산인 긴급법까지 동원하자 시위는 더욱 격화되고 있다. 홍콩 행정 수반인 캐리 람 행정장관은 어제 “상황 악화 시 모든 옵션을 배제하지 않을 것”이라며 중국군의 개입 가능성까지 시사했다. 시위 현장에서는 중국군과 시위대가 대치하며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중국군의 개입은 일국양제의 종언을 고하는 동시에 홍콩의 아시아 금융허브 위상을 붕괴시킬 게 불을 보듯 뻔하다. 한때 ‘동방명주(아시아의 진주)’라 불린 홍콩 전체가 암흑천지로 바뀌지나 않을까 걱정된다.

주춘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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