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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 (일)

[설왕설래] 연쇄살인 시그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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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연쇄살인범들의 특징은 시그니처가 있다는 점이다. 범인들이 범죄 현장에 남기는 고유한 패턴, 즉 반복되는 범행 수법과 특정 표식이나 힌트들이 시그니처다. 범인들은 이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의도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드러낸다.

영국 연쇄살인마 잭 더 리퍼가 대표적인 사례다. 리퍼는 1888년 런던에서 5명 이상 살해했지만 붙잡히지 않았다. 희생자는 모두 성매매 여성이었다. 칼로 살해된 시신이 외과 수술용 칼처럼 예리한 흉기로 다시 훼손된 공통점도 있다. 당연히 범인은 해부학적 지식이 있는 의사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빅토리아 여왕까지 검거 방법을 제시했을 만큼 대대적인 수사를 펼쳤지만 헛수고였다. 결국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 리퍼 사건은 만화, 뮤지컬, 영화, 게임 등의 소재로 쓰이며 하나의 산업이 되었다. 잔혹한 연쇄살인사건이 돈벌이가 되다니 아이로니컬하다.

테드 번디는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연쇄살인범이다. 1974년부터 5년 새 30명을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가짜 붕대나 석고 깁스 등을 사용해 장애가 있는 것처럼 속여 동정심을 유발하는가 하면 매력적인 외모와 말투로 여성을 유인해 성폭행하고 살해했다. 시신을 토막 내 산에 버리고 머리 부분은 썩을 때까지 집에 보관하는 특이 행동을 했다. 번디에게 살인은 하나의 취미였다. 살인을 해야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니 섬뜩하다.

로스쿨에 다닌 경력 등은 언론과 대중의 눈길을 끌었다. 1979년에 열린 재판은 사상 유례 없이 생중계되었다. 엄청난 양의 팬레터가 교도소로 날아들었고 많은 여성들이 번디를 직접 보기 위해 법정을 찾았다. 심지어 그를 연모하던 한 여성은 무죄를 확신하며 후원했고 재판 도중 결혼해 아들까지 낳았다. 1989년 번디가 처형되기 직전에 이혼을 했다.

화성 연쇄살인범 이춘재도 시그니처를 남겼다. 속옷이나 스타킹 등 피해자의 물품으로 피해자에게 재갈을 물리거나 두 손을 뒤로 묶었다. 이춘재가 프로파일링을 동원한 수사에서 14건의 살인과 34건의 강간·강간미수 범행을 자백했다. 연쇄살인범들이 과학수사 포위망을 뚫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김환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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