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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기고] 이럴 때는 홍차를 마셔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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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히 영국에 왔기 때문이다. 늘 커피를 마시던 내가 홍차를 마시게 된 것은. 대부분의 영국 사람들은 매일 홍차를 마시는데, 오전에 한 잔 오후에 한 잔은 기본이다. 외출 후 집에 돌아와서든, 할 일을 끝낸 후든, 언제든지 생각날 때마다 차를 마신다고 봐야 한다. 하루에도 수시로 바뀌는 변화무쌍한 날씨도 차 마시기에 적합하다. 춥고 축축한 겨울뿐만 아니라, 덥지 않고 비가 오락가락하고 쌀쌀하기까지 한 여름에도 따뜻한 차 한잔 생각이 굴뚝 같다.

미국에 살면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늘 인사를 하는 미국인만 보다가, 딸의 등굣길에서 매일 만나는 영국인이 그렇지 않아 당황했다. 영국인은 프라이버시가 중요하고, 괜스레 인사했다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불편해지는 것을 싫어하며, 사교적이지 않고 부끄럼을 타고, 소개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인사한다는 것을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다. 영국에 산지 반 년쯤 지나 딸에게 친구가 생긴 후, 딸 친구 엄마들과 말을 하게 될 즈음에서야 겨우 안면을 튼 셈이다. 대화는 대개 “Would you like to drink a cup of tea?(차 한잔 하시겠어요?)”로 시작하고, 차 한 잔을 마시면서야 서로를 알게 되는 것이다. 나의 홍차 마시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지금은 한국에서도 마시는데 이상하게도 영국에서 마시는 홍차가 더 맛있다. 물에 석회가 많아 마시기에 좋지 않고 물 끓이는 주전자의 바닥에는 허연 석회가 굳어 있는데도, 나는 영국 물을 끓여 영국 우유를 넣은 홍차가 더 맛있게 느껴진다. 매일 아침 커다란 머그잔에 티백을 넣어 끓인 물을 붓는다. 홍차색이 진하게 우러나길 기다렸다가 우유를 넣어 마시는 화이트티를 좋아하는데, 나른할 때는 설탕까지 넣어 달콤하게 마시는 builder’s tea가 좋다. 영국 친구들을 따라 마시게 된 나의 홍차 취향은 보통 영국인들이 많이 마시는 대중적인 맛이다. 수많은 종류와 다양한 맛의 더 비싼 고급 차가 많은데도, 나는 이 맛이 익숙하고 좋다. 영어의 악센트뿐 아니라 정원의 꽃 색깔과 옷차림에도 계급이 녹아있다는 영국에서 나의 홍차 취향은 어쩌면 중류나 하류계급일지도 모르겠다.

화창한 주말, 템즈 강가에 있는 예쁜 마을 핸리(Henley on Themes)에 갔다. 작년과 똑같은 모습으로 주말을 즐기는 영국 사람들을 바라보며, 남편과 나도 작년에 걷던 길을 또 걸었다. 한참을 걷고 나니 차 한 잔이 생각난다. 예전에 갔던 카페에 들어가 크림티(cream tea, 홍차와 함께 갓 구운 스콘, 크림, 각종 잼이 따라 나온다)를 주문했다. 1926년에 오픈했다는 카페가 여기서는 놀랄 일이 아니지만, 뭐든 오래 계속하는 게 제일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신뢰가 간다. 우유를 넣은 홍차를 한 모금 넘긴 후, 스콘 조각 위에 크림과 살구잼(꿀, 딸기잼도 있다)을 발라 입안에 넣으니 “아~”하고 탄성이 나온다.

“You can’t buy HAPPINESS but you can buy CAKE. And that’s kind of the same thing(행복을 살 수는 없지만 케이크는 살 수 있다. 그건 어느 정도 같은 것)”이라니 이건 행복의 맛이다. 지금 이 순간은 행복만 생각하기로 한다. 죄책감 없이 즐기는 것이 우선이고, 늘어나는 체중보다 행복이 먼저라고. 매일 영국 사람들이 차를 마시고, 곳곳에 차 마실 곳이 많은 것은 이런 행복의 순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I’ll put the kettle on.”

누군가에게 차를 대접할 때 흔히 하는 말이다. 불 위에 주전자를 올려 물을 끓이겠다는 의미일 텐데, 전기포트를 사용하는 지금도 이렇게 말한다. 뭔가 할 말이 막힐 때, 곤란한 상황을 잠시 모면하고 싶을 때, 불편한 순간을 부드럽게 할 때, 잠시 시간을 벌어 숨을 고를 때도 이렇게 말하고 차를 우린다. 힘들고 지칠 때, 바쁠 때, 잠깐 쉬어갈 때도 차를 마시지만, 서로 의견이 맞지 않을 때, 어려운 말을 해야 하는데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를 때, 그저 어색할 때, 살짝 곤란하거나 몹시 난감할 때도 차를 마셔보자. 친구와 마시고, 동료와 선후배와도 마시고, 남편과도 마셔보자. 늘 관계로만 대하던 시어머니와 며느리도 함께 차 한 잔을 마셔보자. 팍팍한 하루에는 여유가 생기고, 마음은 따뜻해지지 않을까?

“Wouldn’t it be dreadful if you live in a country where they didn't drink tea?” (차를 마시지 않는 나라에 산다면, 너무 삭막하지 않을까요?)

이진숙 전 ‘클럽 리’ 대표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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