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이 이끄는 문민정부에서는 민주주의의 시계추를 개발연대에 경험한 권위주의적 독선의 극단도 아니고 1987년 이후 겪은 과격하고도 무질서한 또다른 극단도 아닌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질서 있는 민주주의라는 중간지점에 정착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를 이루지 못하고 1996년 말에는 노동법 파동까지 겪게 되었다."
1998년 초대 재정경제부 장관에 취임해,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극복을 진두지휘했던 이규성 전 장관은 위기 직전 정치·사회 상황을 이렇게 서술했다. 지난 2006년 발간한 ‘한국의 외환위기, 발생·극복·그 이후’라는 책에서다. 이 책은 경제관료들 사이에서는 ‘외환위기 징비록’으로 불린다. 위기 대응 매뉴얼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발간된지 10년 이상 지난 이 책을 도서관까지 찾아가서 들여다보게 된 계기는 최근의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 파동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0일 조국 장관에게 임명장을 주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20년 전 역사를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았다. 더 정확히 이야기 하자면,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과거 역사를 통해 준비해야 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IMF 외환위기는 반도체 경기 부진에 따른 경상수지 적자의 장기화, 경제 기초체력에 맞지 않은 과도한 자본자유화로 인한 단기성 외자차입 급증, 부채에 의존한 재벌들의 몸집 불리기 등 경제적인 요인이 주된 발생이유였다. 하지만, 이규성 전 장관은 정치·사회적 혼란도 위기 발생에 큰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우리사회의 기강은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삼풍백화점이 붕괴되는 참사가 발생될 때까지 아무런 대책도 세워 놓지 않은 지경에 이르렀다. 지하철을 수리한 후 공구를 치우지 않아 탈선사고도 발생하였다. 공권력의 상징인 경찰관이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복지부동이라고 공직사회의 무사안일을 나무라지만 이는 비단 공직사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며 사회 각 분야에 만연한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사회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규범인 신의·성실마저도 외면당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검찰 업무를 관장하는 법무부 장관과 그 가족들이 검찰 수사 선상에 올라있는 상황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심경은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삼풍백화점이 붕괴되는 참사’를 겪었을 때 충격과 비슷할 것이다.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정신적 충격을 강요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신의·성실’을 이야기하는 게 설득력이 있을까.
미국 MIT 교수인 대런 애쓰모글루는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라는 책에서 "미국이 번영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좋은 경제 제도를 가졌던 덕분이고, 북한이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경제 제도가 나쁘기 때문"이라고 썼다. 그러면서 좋은 경제제도를 "법률을 공평무사하게 집행하며 누구나 교환 및 계약이 가능한 공정 경쟁의 환경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규칙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최고 권력자가 좋은 경제 제도의 근간인 ‘신의·성실’을 흔드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기대할 수 있을까.
문재인 대통령은 "검찰은 검찰이 해야할 일을 하고, 장관은 장관이 해야할 일을 해나간다면 그 역시 민주주의의 발전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일"이라고 했다. 멋있는 말이지만, 경제계에서는 그 과정에서 빚어질 정치·사회적 혼란과 그 후유증을 걱정하고 있다. 한 대기업 임원은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 관련 뉴스를 SNS 메시지에 담아 전송하면서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인데 나라 경제는 어떻게 될까요"라고 한탄했다. 그는 "경제가 침몰 중인데 온 나라가 엉뚱한 데 힘을 빼야할 지경"이라고 했다.
경제연구기관들이 예측하는 2.0%안팎의 올해 성장률 전망치는 IMF 외환위기 이후 가장 낮은 수치 중 하나다. 앞으로10년, 20년 뒤 ‘경제위기가 임박했는데도,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 때문에 온 나라가 싸우느라 아무 대응도 못했다’는 평가가 나오지 않을까 두렵다.
정원석 정책팀장(lllp@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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