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6 (금)

[ESC] 맥주가 사무치게 그리워 라오스 별 등지고 떠나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노동효의 지구 둘레길

라오스 퐁살리에서 출발

롤로족 마을에서 만난 비밀경찰

‘죽은 자의 날’이라며 붙잡는 이들

결국 오토바이 펑크 나는 등 곤욕

강도인 줄 알았던 부족

에스코트해 안갯속 빠져나와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겨레

라오스 최북단, 퐁살리. 중국 윈난성과 맞닿은 고산지대로 국적 불문하고 여행자를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 같은 곳. 사진가 O와 아침 식사를 하며 지도를 펼쳤다. 어느 방향으로 떠날지 가늠하다가 서북쪽 길을 따라가기로 했다. 현지인에 의하면 비포장도로를 따라 다양한 소수부족이 산다고 했다. 방향을 정했으니 교통수단을 구할 차례. 관광객이 없으니 오토바이 대여점이 있을 리 없었다. 이런 곳에선 오토바이 수리점에서 중고품이 있는지 알아본다. 하루치 가격을 제시하고 ‘빌린 일수만큼 가격을 치르겠다’고 하자 흥정이 이뤄졌다. 다행히 중고품이 한 대 있었다. 중국산.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햇살을 받으며 퐁살리를 빠져나와 저물 때까지 달렸다. 마을이 나오면 허기를 채우고 정보를 얻었다. 아카족 여인에게 물으니 2~3시간 더 달리면 롤로족이 사는 마을이 있다고 했다. 중국에선 ‘이’(彛)라 부르는데 라오스에선 ‘롤로’(lolo)라 부른다. 소수부족 시장에 닿았다. 아카족 소녀들이 깔깔거리며 로로족이 사는 산을 알려주었다. 산길을 오르긴 늦은 시각. 잠잘 곳을 찾아야 했다.

여관이 있을 리 없었다. 이럴 땐 이장을 찾는 게 최선의 방법. 한 집의 호의로 방을 구해도 이장이 이방인을 들이지 않겠다면 마을을 나와야 한다. 이장은 호의적인 사람이었다. 숙박비를 내겠다고 하자 마을 공동 가옥을 내주었다. 어둠이 내리자 선선했고 곧 잠이 들었다. 비포장 진동이 몸으로 전달되었을 테니 피곤하지 않을 리 없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 몸을 흔들었다. 세 개의 빛줄기가 방을 휘젓고 있었다. 내가 손전등을 켜자 앞을 가렸다. 상대는 나를 보는데, 나는 상대를 볼 수 없는 상황. “비밀경찰인 것 같아요.” O가 말했다. 라오스에선 마을 사람끼리도 누가 비밀경찰인지 모른다. “여권 내놔!” 그러나 여권을 보여줄 순 없었다. 암시장에서 한국인 여권은 비싼 가격에 팔린다. 상대가 여권을 받아 내빼버리면 큰일이었다. 복사본을 내밀었다. “원본!” “오토바이 빌릴 때 맡겨서 원본이 없어.” O가 말했다. 결국 내 여권을 내밀었다. 상대가 첫 장을 들췄다. 불빛이 내 얼굴을 향했다. 사진과 실물을 비교하는 모양이었다. 다음 장. 사내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파벳을 읽지 못하는 듯했다. 내용 파악이 안 되자 화살이 O에게 날아갔다. “원본!” 졸음이 쏟아졌다. 자고 싶었다. 순간 떠오르는 게 있었다.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명함을 내밀었다. 어둠 속에서 나온 손이 명함을 채갔다. 불빛들이 명함을 비췄다. “네 친구 맞아?” “휴대전화 줘, 바꿔줄 테니 직접 물어봐!” 손을 내밀자 사내들이 비명 지르듯 소리쳤다. “아니! 전화 안 해도 돼. 깨워서 미안. 편히 자.” 사내들이 달아나듯 집을 나갔다. 내가 내민 건 라오스 정부기관지 국장의 명함이었다. 그들이 사라진 후의 잠은 달콤했다.

아침 일찍 오토바이를 숲에 감추고 오솔길 따라 산을 올랐다. 스무채 남짓 모인 마을이 나왔다. 롤로족 아이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빛내며 다가왔다. 우린 비눗방울 장난감을 꺼내 후후 불었다. 반짝이는 비눗방울이 허공을 날았다. 아이들 눈이 동그래졌다. 한 아이가 손끝으로 방울을 터뜨리곤 까르르 웃었다. 비눗방울 장난감을 내밀었다. 후우. 서로 불겠다며 줄을 섰다. 부모들이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시장에서 사 온 자두를 할머니께 드렸다. 할머니가 맛보곤 옆 사람에게 맛을 설명했다. 다들 하나씩 집어 맛을 보았다. 시다며 인상을 쓰고, 그 모습을 보며 깔깔대고, 어떤 이는 하나 더 먹어도 되냐고 몸짓으로 물었다. 그렇게 이방인을 만난 적 없는 사람 속으로 녹아드는 것이다.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오지에서 지내면 맥주가 사무치게 그리울 때가 있다. 차가운 맥주는 문명의 맛.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냉장고가 없으면 그 맛을 볼 수 없으니까. 맥주가 그리우면 도시로 돌아갈 때가 됐다는 신호다. 마을 사람들에게 칫솔과 파스를 나눠준 후 마을을 떠났다. 산에서 내려오며 차가운 맥주를 떠올렸다. 이장에게 맡긴 배낭을 챙겨 떠나자. 퐁살리까지 100킬로미터, 쉬지 않고 달리면 가게들이 문 닫기 전 닿을 수 있을 거야.

이장은 보이지 않고 아이들이 배낭을 꺼내 주었다. 떠날 채비가 끝났다. 그러나 떠날 수 없었다. 주민들이 앞을 막았다. 부족어를 외치는데, 알아들을 수 없었다. 라오어를 하는 학생이 있었다. 마을을 떠날 거라고 전했다. 노인들이 쑥덕쑥덕하더니 답을 했다. 돈을 내라. 당황스러웠다. 이장에게 숙박비를 넉넉히 주지 않았던가. 더 줄 순 없다고 소리치고 시동을 걸었다. 그러자 청년들이 오토바이를 붙잡았다. 일촉즉발. 이장이 나타났다.

“죽은 자의 날입니다. 해가 지면 귀신이 출몰해요. 악귀가 해코지를 할지 몰라요. 도시에 닿기 전 해가 저물 겁니다. 굳이 가겠다면 당신이 낸 돈을 보태 제물을 사고 기도를 드릴게요.”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귀신까지 들먹이며 돈을 뜯는다고 여긴 O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때 이상한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마을 경계를 따라 실이 둘러쳐져 있었다. 그리고 종이 인형도. 돈 몇 푼 받겠다고 집체극을 벌일 리 없었다. 인형은 ‘파수꾼’이고 실은 귀신의 접근을 막는 ‘울타리’인 듯했다. 돈을 냈지만, 노인들이 고개를 저었다. 이장이 말했다. “안 떠나는 게 나아요.” 당부에도 불구하고 우린 떠났다. 사무치게 맥주가 그리웠으니까. 저녁 9시쯤이면 얼음 동동 띄운 비어라오를 마실 수 있을 거야. 맥주 빛깔로 물드는 황혼은 아름다웠고, 해가 저물어도 아무 일 없었다. 죽은 자의 날. 해코지. 다 미신이야. 오던 길에 점심을 먹었던 식당에 닿았다. 이제 서너 고개만 넘으면 퐁살리다!

“바퀴가 이상해요!”

O가 말했다. 식당을 떠난 지 30분. 오르막이라 속력이 안 붙는 줄 알았는데, 뒷바퀴가 터졌다. 귀신의 소행일까? 아냐. 언제 펑크 나더라도 이상할 리 없는 중고잖아. 기억을 더듬건대 고개 건너 몽족 마을이 있었지. O가 핸들을 잡고 나는 뒤에서 밀었다. 산을 넘어 마을에 닿은 건 밤 10시. 전기가 들지 않는 마을. 쏘다니는 아이들에게 얘길 하니 한 집으로 데리고 갔다. 펑크를 손보는 청년이 있었다. 튜브 교체비로 정상가의 두 배를 불렀다. “그렇게 비싸?” “튜브가 없어. 큰 마을 가서 사와야 해.” 오가는 노고를 생각하면 바가지는 아니었다. 교체를 하면서도 곤욕을 치렀다. 받침대 없는 중고 오토바이라 작업 내내 O와 내가 벌서듯 들고 있어야 했으니까. 차가운 맥주 한잔 마시려다가 이 무슨 개고생이람!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다시 길을 떠났다. 2시간을 허비했지만, 달릴 수 있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새벽 1시면 퐁살리에 닿을 것이다. 가게 문은 닫았겠지만, 여관 냉장고의 맥주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바람은 오래가지 않았다. 출발한 지 반 시간, 우린 인적 없는 숲에 망연히 서 있었다. 이번엔 앞바퀴였다. 연달아 펑크라니 귀신의 소행일까? 아냐! 앞바퀴 교체할 시기가 된 거야. 다시 고행이 시작되었다, 시원한 맥주 한잔 마시려다가.

자정 넘어 농가를 발견했다.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계십니까? 문이 열리고 청년들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내다봤다. 사정 얘길 하고 오토바이 수리점이 있는지 물었다. 아직 우리는 맥주에 대한 바람을 단념하지 않았다. 청년이 전화를 걸었다. 한 사내가 튜브를 갖고 나타났다. 다행이었다. 사내가 튜브값을 받고 돌아섰다. “튜브만 주면 어떡해?” “바람 넣는 펌프가 없어. 나머진 너희가 해결해.” 펌프 하나 없는 마을이라니! 한숨을 푹푹 쉬는데 250㏄ 오토바이 두 대가 앞에 섰다. 두 명씩 타고 있었다. 펌프가 있는데 대가로 돈을 달라고 했다. 거친 말투. 사나운 눈빛, 건들대는 몸짓. 지갑을 보이면 일이 더 꼬일 것 같았다. “잠깐 빌리는데 4만킵을 달라고?” “필요 없으면 말든가.” 사내가 시동을 걸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새 튜브와 펌프, 뒷바퀴를 교체하면서 요령도 생겼고,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오토바이를 들어 찢어진 튜브를 빼내고, 새 튜브로 갈고, 공기를 불어 넣고, 작업 끝. 그랬는데 떠날 수 없었다. 오토바이 열쇠가 보이지 않았다. 오토바이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사이 열쇠가 빠진 모양이었다. 어디에도 없었다. 귀신 곡할 노릇이었다. 악재가 겹치자 진이 다 빠져 망연자실해 있는데 누군가 소리쳤다. “저기 반짝이는 게 보여!” 하수도를 덮은 판재 아래 열쇠가 보였다. 꼬챙이를 찾고, 수차례 실패 끝에 열쇠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맥주는커녕, 일단 자고 싶었다. 새벽 3시면 퐁살리에 닿을 것이다. 여관부터 찾고 잠부터 자자. 그러나 출발한 지 5분, 퐁살리에 새벽 3시에도 닿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피어오른 안개로 앞을 볼 수 없었다. 엉금엉금 가는데 뒤따르는 놈들이 있었다. 묵직한 배기음. 환한 불빛. “돈 줄 때 지갑을 보이지 말았어야 했어요.” O가 속력을 높였다. 바퀴가 구덩이에 빠지며 위험한 상황이 이어졌다. “안 되겠어요.” 달아나기를 포기했다. 오토바이 한 대가 앞을 막고, 한 대가 뒤에 섰다. 예상대로 그 녀석들이었다.

“한 대는 앞에서, 한 대는 뒤에서 길을 밝힐 테니 따라와. 안갯속에서 그 오토바이로 가는 건 위험해. 큰 도로까지 바래다줄게.”

강도질을 하려던 게 아니라 우리 걱정에 뒤따라왔던 거구나. 덕분에 자욱한 안갯속에서도 길의 굽이와 구덩이가 훤했다. 뒤에서 쏘는 조명. 앞으론 안개의 은막. 오토바이 탄 그림자. <야간 드라이브>란 제목의 그림자극을 상연하는 것 같았다. 능선에 올랐다. 하늘이 환했다. 오리온은 은하수를 이끌고 서쪽으로 달려가고.

도시에 도착하고 맥주도, 잠자리도 구하지 못했다. 어떤 여관도 그 시간에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우린 벌벌 떨며 아침까지 밤을 새워야 했으니까. 젠장 처음부터 주민들 말을 들을걸.

한겨레

글·사진 노동효(<남미 히피 로드> 저자·여행작가)

[▶동영상 뉴스 ‘영상+’]
[▶한겨레 정기구독] [▶[생방송] 한겨레 라이브]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