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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은 性이 없다①] 한국의 빌리 엘리엇 "남성의 몸도 아름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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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노 임선우가 16일 오후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발레단에서 더팩트 취재진과 인터뷰를 갖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덕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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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노동부 한국직업사전에 따르면 국내 존재하는 직업은 총 1만2145개에 이른다. 직업은 많지만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성역할 고정관념'은 여전하다. 2018년 기준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은 52.9%를 기록했지만 전문·관리직 종사자는 23%에 그쳤다. 대부분 사무·서비스·판매 분야에 치우쳤다. 과학기술연구개발인력에서 여성 비율은 20% 수준이고, 여성노동자의 40%가 비정규직으로 남성의 2배에 가깝다. '성역할 고정관념'은 남성도 불행하게 한다. 성별에 관계없이 발달한 잠재력을 억누르고 '남성에게 걸맞는 직업'에서 약육강식 경쟁을 벌여야 한다. <더팩트>는 뿌리깊은 성역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세 사람을 만났다. 첫번째 순서는 '한국의 제1대 빌리 엘리엇' 임선우 씨다.

'발레리노' 임선우 유니버설 발레단원 인터뷰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1980년대 영국 북부 더럼의 한 탄광촌.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의 대대적인 탄광산업 구조조정에 광부로 일하던 아버지와 형은 노조에 가입해 파업을 감행한다. 그러는 사이 11살 소년 빌리는 권투학원 한켠에 마련된 발레 강습에 마음을 빼앗기고, 빌리의 재능을 알아본 발레 선생 윌킨슨 부인은 권투 대신 발레를 배우게 한다. 으레 발레란 여자 아이들만 배운다는 고정관념으로 꽉 막힌 아버지는 빌리를 집안에 가둘 정도로 격렬히 반대한다. 그러나 곧 발레에 대한 아들의 열정을 이해하고 매일같이 타던 노조원 트럭에서 내려 삽을 들고 탄광촌으로 걸어간다. 수십 년 후 탄광촌에서 평생을 보낸 아버지는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화려한 극장에서 유명 발레리노가 된 빌리의 공연을 보며 눈물짓는다.

2000년 개봉한 영국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내용이다. 영국에서조차 생소했던 남성 무용수의 성장기를 담은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다. 뮤지컬로도 각색돼 2005년 3월 런던 초연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서 공연 중이다. 한국도 라이선스를 따는데 성공해 2010년 8월 첫 막을 올렸다. 당시 ‘1대 빌리’로 선발된 4명 중 1명이었던 유니버설발레단 임선우(20) 씨는 어느덧 소년에서 '남성'이 됐다. 발레를 배우는 소녀들 사이 엉거주춤 끼어 있던 영화 초반부 빌리의 모습은 그에게도 낯선 광경이 아니었다. 어머니 손을 잡고 처음으로 들어간 한 문화센터 발레교습소에서 남자는 오직 혼자였다. 어린 시절 “발레는 여자만 하는 것 아니냐”는 친구들의 말에 해명하는 일은 일상다반사였다. 그러나 만 7세 무렵 어머니에게 “제대로 발레를 해보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로 조숙하고 열정이 남다른 그에게 남성 무용수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비집고 들어갈 곳은 없었다.



◆“남자가 하는 발레도 얼마나 멋있는데!”

선우 씨는 6세 때 처음으로 발레를 시작했다. 아들의 구부정한 자세를 걱정한 어머니는 지역 내 문화센터에서 발레 수업을 듣게 했다. 수업을 듣는 남자 아이는 오직 그 한 명이었다. 기억이 안날 법도 한데, 선우 씨는 “사실 ‘쬐끔’은 민망했다”고 회상했다. 민망함도 잠시, 6세 소년은 발레에 빠르게 빠져들었다. 한창 밖에 나가서 뛰어놀 시기였지만 발레교실에서 2년을 보냈다. 초등학교를 막 입학했을 무렵 어머니에게 “발레를 제대로 해보고 싶다. 아예 발레를 전공해 춤추는 무용수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센터 내 특별수업을 거쳐 정식 발레학원에 가도 남자 아이는 1~2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사회가 정한 성 고정관념에 구애받지 않고 아이를 키운 선우 씨의 부모는 어린 아들의 결정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선우 씨는 “부모님께서는 ‘남자는 이래야 한다, 여자는 저래야 한다’는 방식으로 저를 키우시지 않았다. 장난감을 사주실 때도 제가 좋아하는 공룡 인형을 비롯해 소위 여아용 완구 코너에 있는 소꿉놀이도 사주시곤 했다”고 고마워 했다.

아직 고사리 같은 손발의 어린 아이였지만 선우 씨의 열정은 누구보다 확고하고 진지했다. ‘막상 이쪽으로 가려하니 힘들고 아픈 일도 많았지만’ 고된 훈련도 그저 재밌기만 했다. 발레수업은 처음 문화센터에서 배운 그것과 다를 바 없이 그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이미 선우 씨에게서 발레는 뗄 수 없는 존재가 됐지만 또래에게는 그 모습이 생소했다. 예술중학교로 진학한 후에는 거의 없었지만, 아직 초등학생이었을 때는 “남자가 발레를 한다고?”라는 친구들의 질문 공세를 받기도 했다. 더 이상 일말의 민망함도 없었다. 특유의 선한 성격이 베어 나오는 조곤조곤한 말투로 ‘남자 무용수가 얼마나 멋있는지’를 설명하곤 했다.

“친구들이 학교 끝나고 뭐하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어요. 그때마다 저는 ‘나는 발레하러 간다’고 말했는데 친구들이 눈을 크게 뜨고 ‘에? 발레를 한다고? 그건 여자만 하는 거 아니야?’라고 물어봤던 게 기억나요. 다 어릴 때 일이죠.(웃음) 그럴 때마다 제가 설명을 했죠. 남자 무용수도 굉장히 멋있다고요.”

◆최연소 국제 콩쿠르 우승…“빌리에게 고마워요”

선우 씨는 지난 6월 제12회 코리아국제발레콩쿠르 시니어 남자 부문에서 금상(공동 1위)을 수상했다. 만 19~27세인 시니어 부문 연령을 감안하면 최연소의 나이로 우승을 거머쥐었다. 2017년 10월 유니버설발레단 코르드발레(군무) 단원으로 활동 중인 선우 씨는 하반기에만 발레 춘향, 지젤, 심청 등 공연 일정이 빼곡하다. 더 이상 ‘1대 빌리’라는 수식어만 붙이기에 아쉬운 발레리노가 됐다. 그럼에도 선우 씨는 여전히 빌리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기술의 서사만이 아닌 관객에게 마음을 전하는 예술로서의 발레를 가르쳐 준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종종 ‘1대 빌리’라는 말이 부담스럽거나 지겹지 않냐는 분들도 계신데, 저는 전혀 그렇지 않아요.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를 한 경험이 무용수로 활동하는 지금도 엄청난 도움이 돼요. 노래나 탭댄스를 배울 수 있었던 건 물론이고 2시간이 넘는 공연을 주인공으로 이끌면서 긴 발레 공연에도 지치지 않고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배울 수 있었거든요.”

만 11살, 빌리와 비슷한 나이에 그 역할을 맡은 선우 씨. 그와 빌리와 공통점은 ‘춤 사랑’이다.

“빌리는 춤을 정말 사랑하는 아이잖아요. 영화를 보면 빌리는 춤출 때 어떤 기분이냐는 질문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말로도 부족하다. 전기를 타고 날아다니는 것 같다’고 말하는데 저도 그렇거든요. 지금도 기분이 영 안 좋다가도 발레를 하면 잠시나마 잊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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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노 임선우가 16일 오후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발레단에서 더팩트 취재진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덕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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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의 아름다움에 성별은 없다

예술의 범위는 넓지만 발레처럼 인간의 몸으로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분야는 늘 여성의 전유물이었다. 대부분 종목이 남성과 여성으로 나뉜 스포츠에서조차 예술성이 가미된 종목은 남성 선수의 출전을 아예 금하고 있기도 하다. 일례로 음악에 맞춰 후프, 리본 등 수구를 이용해 신체 율동을 표현하는 리듬체조는 본래 여성만을 위한 체조가 아니었다. 그러나 수구를 사용한 표현력과 음악에 맞춰 선보이는 아름다운 율동 능력이 강조되면서 올림픽에서는 여성 선수만이 출전할 수 있게 됐다. 남녀 선수 모두 활발히 경기 활동을 펼치는 수영 종목 중 유일하게 ‘금남의 벽’으로 불렸던 아티스틱 수영 역시 음악에 맞춰 물속에서 연기하는 예술적인 종목이다.

남성 무용수를 생소하게 느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남성이라면 소수점 단위의 기록에 집착하며 승부욕을 불태우는 모습을 떠올리는 세상이다. 음악에 맞춰 섬세한 몸짓으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발레는 ‘여성스러운 것’으로 치부된다. 발레리노의 존재 이유를 오로지 발레리나를 떠받들어 지탱하는 등 강한 힘에서 찾는 시선도 적지 않다. 선우 씨는 발레에서 중요한 ‘아름다운 몸의 선’을 발레리나에게서만 찾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다.

“어릴 때 모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발레리노 특성상 딱 달라붙는 타이즈를 입는 모습을 희화화한 코너를 본 적 있어요. 저도 별 생각없이 재밌게 봤는데요. (웃음) 학교에 갔더니 그걸 본 친구들이 ‘정말 남자들도 다 저렇게 입고 해?’라고 묻더라고요. 그럴 때마다 대답했죠. 사람의 몸이 지닌 아름다운 선을 표현하는 거라고요.”

그는 남성의 몸을 아름답게 바라보는데 익숙찮은 이들에게 영국 안무가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를 추천했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 마지막 장면에서 성인 빌리가 공연한 작품 역시 매튜 본의 ‘발레리노 버전’ 백조의 호수였다. 차이코프스키의 원작이 저주에 걸려 백조로 살아가는 오데트 공주와 그가 사랑하는 왕자의 이야기였다면, 본의 백조의 호수에는 여왕인 어머니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에도 실패한 왕자의 이야기다. 고뇌에 빠진 그가 호숫가에서 만난 백조 역시 가냘프고 처연한 공주가 아닌 근육질의 남성 백조다.

“매튜 본의 백조를 보면 남성의 몸도 얼마나 아름다운 선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어요. 꼭 아름다운 몸선이 여자에게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매튜 본의 백조가 보여주는 근육의 갈라짐, 잔근육을 타고 흐르는 선도 얼마든지 ‘아름답다’고 표현할 수 있거든요. 남성의 몸을 무조건 강한 존재, 스포츠적인 존재로만 보지 않았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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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한 장면/더팩트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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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백조가 세상에 던지는 메시지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 어린 빌리를 연기한 영국 배우 제이미 벨은 이제 30대 청년이, 20대 빌리 역을 맡은 발레리노 아담 쿠퍼는 불혹의 베테랑이 됐다. 한국의 1대 빌리였던 선우 씨 역시 아직 성인이라는 단어가 어색하지만 한국 나이로 스물을 맞았다. 그 사이 빌리의 고향인 영국에서는 2002년 로열발레학교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남자 신입생 수가 여성을 앞질렀고, 2014년에는 발레를 가르치는 남학교 런던보이즈발레스쿨이 세계 최초로 문을 열었다. 선우 씨가 추천한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는 편견이라는 베일 너머 발레리노를 바라보는 시선의 상징이자, 더 성숙하게 인지할 지표다. 본이 1995년 처음으로 선을 보인 ‘남성판’ 백조의 호수 속 주인공은 영국의 발레리노 아담 쿠퍼였다. 쿠퍼는 다름 아닌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 20대 빌리를 연기했다. 본의 성공과 함께 쿠퍼 역시 세계적인 발레리노가 됐지만, 그 역시 자신이 영화 속에서 분한 빌리와 비슷한 과거를 거쳤다. 남성 무용수에 대한 시각이 더욱 열악한 시대에 유년기를 보낸 그는 "어린 나이에도 남성이 무용을 한다는 것이 ‘낙인인 것을 알았다"고 회고한다. 그는 초등학생 시절 누구에게도 발레학원을 다닌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영화 마지막 장면 힘차게 도약하는 그의 모습은 빌리뿐 아니라 쿠퍼 자신이기도 하다.

서구권 국가에 비해 발레와 거리가 먼, 남성 무용수는 더욱 생소한 한국에서도 인식은 조금씩 변하고 있다. 선우 씨가 어린 시절 재미있게 봤다던 코미디 프로그램 속 발레리노 코너는 폐지된지 오래다. 2006년 인기리에 방영됐던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는 러시아 출신 발레리노 역을 맡은 배우를 일상생활에서도 타이즈를 입은 채 사는 것처럼 연출하는 등 편견이 가득한 내용을 담았다. 당시 웃고 넘겼던 한국의 대중도 이제는 점점 바뀌고 있다. 현업에 있는 선우 씨는 온 몸으로 실감 중이다. 어린 시절 친구들끼리도 해명 아닌 해명을 했던 시대를 넘어, 올해 초 유니버설발레단에서 주최한 행사의 일환으로 만난 취미발레를 배우는 부부의 모습은 그에게도 인상 깊었다.

"관객 분들 눈빛에서 발레라는 예술에 얼마나 진중한 관심을 갖고 있는지 느낄 수 있어요. 요즘 취미발레를 하는 분들도 많이 계시고요. 올해 초 행사에서 취미로 발레를 하시는 분들을 모아 강연하는 자리를 가졌는데, 부부가 함께 발레를 배우는 분들을 봤어요. 게다가 남편 분께서 열정이 더 많으시더라고요. ‘우리나라도 많이 바뀌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아직까지도 발레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후배들에게 선우 씨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영화 속에서 빌리가 아버지한테 발레를 배운다는 사실을 들키고 된통 혼나서 친구 마이클에게 상담하는 장면이 있어요. 그때 마이클이 ‘네가 하고 싶은 걸 해라, 자기자신을 표현하라’는 노래를 불러줘요. 저도 제 후배를 만난다면 그렇게 말해주고 싶어요. 이제 시대는 많이 변했고, 더 변할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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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raoh_@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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