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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의 비장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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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회승
정책경제 에디터


‘역사의 한복판에 서 있다’는 걸 문득문득 절감할 때가 많다. 남·북·미 대화와 갈등이 숨가쁘게 진행되고, 미-중 패권전쟁이 가열되던 지난해부터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쏟아지는 매머드급 이슈들로 전세계가 요동치는 현실이 눈앞에서 시시각각 펼쳐진 때문일 게다.

이 생생한 역사의 현장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전세계 기자들이 트럼프의 트위터를 확인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는 게 농담에서 일상이 됐으니 말이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와 일방주의가 전세계에서 뭇매를 맞고 있지만, 분명한 건 그런 트럼프의 전략이 국제 질서를 바꾸고 있다는 거다. 정치 경험이 없는 아웃사이더 출신 대통령의 무모함으로 여기는 이들은 이젠 없다. 그는 가장 명확하고 간결하게 미국의 국익을 이야기한다. 가끔씩 국내 정치용으로 과장하거나 거짓말을 하지만, 전략적 모호성이나 외교적인 레토릭으로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지 않는다. 국제사회의 보편성과 무역질서를 무시하는 완력을 행사하며 ‘미국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명확히 각인시킨다. 덕분에 우리도 냉정한 현실을 깨달았다. 한반도와 민족의 운명과 미래가 달린 비핵화와 남북 관계가 그의 사소한 정치 일정에 좌우되는 모습에 무력감을 느끼지만, 동시에 70년 한-미 동맹은 결국 미국의 안보와 경제적 이익에 부합할 때만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트럼프 외교는 결국 힘의 논리다. 상대가 나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거다. 나보다 힘이 약하면 굴복하라는 거다. 정당성 여부를 떠나 미국만이 보유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가 재선에 실패하면 미-중 관계는 다시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트럼프의 미국’이 아니었다면 사정이 많이 달라졌을까? 그럴 것 같지 않다. 트럼프를 ‘미국의 수치’로 여기는 미국 민주당도 중국에 관해서는 어찌 보면 트럼프보다 더 강경한 태도다. 중국의 부상에 대한 미국 주류의 태도는 공화·민주를 가릴 것 없이 ‘용납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미국의 ‘중국 때리기’는 100년 가까이 지속되어온 미국 일국주의의 균열을 막으려는 것이다. 과거 러시아와 일본의 부상을 그렇게 제압했던 역사가 있고, 이번엔 중국 차례라는 분석(전병서)은 그래서 일리가 있다. 문제는 중국은 앞선 두 나라와는 체급이 다르고, 미국의 힘 또한 과거와는 다르다는 점이다. 근육질의 젊은 사자에게 제 힘을 과시하려는 늙은 사자의 포효에 불과하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2008년 금융위기는 미국 쇠퇴의 시작이자 중국 부상의 계기가 됐다. 미국은 달러 기득권(기축통화)으로 휘청거리는 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웠지만 중국의 도전에 힘에 부친다. 자신이 앞장서 만든 세계무역기구를 스스로 무력화시키고 보호무역을 주창하는 미국, 자유무역을 해치는 주범에서 이젠 미국을 향해 “룰을 지키라”고 응수하는 중국. 예상치 못한 역설이다. 미-중 패권전쟁이 더 심각해진다면, ‘중국의 생산-미국의 소비’를 두 축으로 확장해온 신자유주의의 글로벌 분업 체제가 더는 작동하지 않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근본적인 ‘게임 체인지’의 서막일 수 있다.

문제는 우리다. 정치가 경제를 좌우하는, 힘의 논리가 새로운 질서가 되는 각자도생의 시대는, 낯설고 거대한 변화다. 특히 ‘수출 대한민국’에는 힘겨운 도전이다. 우리 경제는 지난 30년 동안 신자유주의에 적극 부응했고 세계화의 촘촘한 그물망에 누구보다 발빠르게 진입해 성장해왔다. 이런 글로벌 그물망이 뜯기고 끊어지면, 당장 우리 경제의 톱니바퀴도 제대로 돌아가기 힘들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균형점이 흔들릴 수밖에 없고, 일본은 소재·부품, 한국은 중간재와 완성품, 중국은 조립·생산으로 짜인 분업 시스템도 재편이 불가피해진다. 커진 외형만큼 ‘축적의 시간’을 제대로 갖지 않은 우리 경제의 저질 체력이 이런 도전을 잘 극복할 수 있을까.

이제 와서 무분별한 자유무역협정 등 자생력 없는 경제를 만들었다고 비판하는 건 별 의미가 없다. 게임의 규칙은 바뀔 수 있다. 현명하고 능동적인 대처가 필요한 때다. ‘한반도의 지정학’이 거세게 요동치는, 비장한 광복절이다.

hon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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