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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6 (일)

[허연의 책과 지성] 한나 아렌트 (1906~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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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던 1941년 한나 아렌트는 프랑스의 한 호텔에 숨어있었다. 철학자이자 시인인 남편 블뤼허를 비롯한 일군의 유대계 지식인들과 함께였다. 그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거쳐 미국으로의 탈출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 엄중한 상황에서도 이 지식인들은 모여 앉아 철학이나 문학에 대한 고담준론을 펼치는 데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아렌트는 달랐다. 아렌트는 자신이 읽었던 추리소설 내용을 하나씩 떠올리며 혼자 시간을 보냈다. 왜 그랬을까. 다른 지식인들이 불안을 떨치기 위해 하나 마나 한 수다를 떨고 있을 때, 아렌트는 탈출의 구체적인 방법을 사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일행은 아렌트가 추리소설에서 찾아낸 방법을 활용해 경찰과 호텔직원을 따돌리고 탈출에 성공한다.

일행들이 모여 앉아 '말'을 하고 있을 때 아렌트는 '사유(思惟)'를 했던 것이다.

켄 크림슈타인이 쓰고 그린 그래픽 노블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을 읽다가 발견한 이야기다.

아렌트의 힘은 사유에서 나왔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세상에서 우릴 이끌어 줄 유일한 진리나 묘책은 없다. 결코 끝나지 않는 난장판이 있을 뿐이다."

이 난장판에 섬광과도 같은 한줄기 진리를 가져다주는 건 사유다. 아렌트는 "사유라는 이성작용만이 빛이 될 수 있으며 진정으로 살아 있다는 건 결국 사유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탈출 과정에서 타인이 아닌 내 자신과의 대화, 즉 사유를 선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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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흘째가 되자 헛소문이 곰팡이처럼 퍼져나갔다. 나는 마침내 합리적인 대화를 이어갈, 지각있고 진실한 대화 상대를 찾아냈다. 바로 내 자신이었다."

시시각각 조여오는 나치의 공포,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유럽대륙의 상황, 이어지는 동료들의 자살과 구금. 이런 악조건 속에서 불안이 곰팡이처럼 퍼져나갈 때 아렌트는 사유를 시작했고 탈출에 성공한다.

아렌트가 1960년 유대인 학살 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면서 '악의 평범성'을 개념화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아렌트는 안경을 낀 왜소한 체격의 전직 청소기판매원을 지켜보며 악은 결코 거대한 곳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아이히만에게서 찾아낸 또 하나의 진리가 있다. 아렌트는 유리관에 갇혀 재판을 받으며 따분한 표정으로 "상부에서 시켜서 했을 뿐"이라는 진술을 반복하는 아이히만을 보며 "천박함에 충격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고는 "사유하지 않음이 악의 근원"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아렌트는 1906년 유대계 독일인으로 태어났다. 학창 시절 퇴학을 당할 정도로 유대인 차별에 저항했던 그녀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고 철학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마르부르크대학에 진학해 하이데거를 만난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제자이자 연인이 된다. 하이데거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그녀였지만 그의 남성 중심적 태도와 나치 폭력에 대한 무비판적 자세를 보면서 그를 떠난다. 이후 순탄치 못한 결혼생활과 가부장적 철학계에 대한 실망을 연쇄적으로 겪으면서 그녀는 자기 자신만의 공화국을 세웠다. 바로 사유의 공화국이었다. 그녀는 사유하지 않는 한, 악(惡)은 늘 우리 곁에 있음을 경고했다.

"생각하는 일보다 생각하지 않고 실행하는 게 더 쉽다. 그래서 악이 등장한다."

자꾸 되새기게 되는 아렌트의 말이다.

[허연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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