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30 (화)

[매경이 만난 사람] 한국경영자총협회 손경식 회장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매일경제

누군가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을 만나 정부 정책을 비판하거나 정치권을 힐난하는 말을 들었다면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 1939년생, 우리 나이로 만 80세를 맞은 손 회장은 천천히 걷고 꼭꼭 씹어 말한다. 누구에게도 상처가 되거나 해가 될 만한 말을 뱉지 않기 위해 문장 하나하나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게 몸에 밴 인물이다.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로 반일 감정을 자극하는 정치적 선동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나오는 지난 29일 경영계의 원로 손 회장에게 해법이 무엇인지 묻기 위해 서울 마포구 경총회관을 찾았다. 지나간 일에 대한 심경을 토로하지도 않고, 최근 사태에 대해 단언적으로 표현하지도 않았다. 답답한 한일 관계에 시원한 해법을 기대했지만 그는 기업인들이 정부를 도와서 난국을 헤쳐나가야 한다는 대답을 내놨다. 다소 밋밋하게 들릴지언정 상식과 끈기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사회 전반에 적폐 청산 움직임이 심했던 지난해 2월 경총 회장 자리를 맡은 손 회장은 감정 대신 논리로 조직을 추슬렀다. 노동계와 수시로 만나 대화하고 정부 인사들과도 접점을 넓혔다. 경총의 영문 단체명을 바꾸면서 노사 관계에만 집중할 게 아니라 경영 환경 전반에 대응할 수 있는 싱크탱크로 키워나가겠다고 했다. 그의 규범은 상식에서 나왔고 업무 성과는 우직한 실행을 통해 배가 됐다.

이럴 때일수록 한일 간 문화축제 등을 통해 기업인 간 교류를 돈독히 해야 한다는 손 회장은 한국의 가장 훌륭한 민간 외교관이기도 하다. 한국에 부임하는 외교관들이 그를 가장 먼저 찾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인터뷰를 마칠 시간이 되자 그는 저녁에 한국을 떠나는 프랑스 대사를 배웅하러 가야 한다며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마치 꽉 막힌 한일 관계는 이렇게 풀어야 한다고 몸소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다음은 일문일답.

―최근 일본의 무역 보복과 우리 정부의 대응을 보면 정면충돌을 예견하는 듯하다. 이럴 땐 기업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정부 차원에서 해법은 없나.

▷나도 처음엔 성의를 다하면 풀릴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진행 상황을 보니 그렇게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닌 듯하다. 그래도 어떻게든 사업은 되어야 하지 않겠나. 기업인들 입장에선 그냥 손놓고 있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뭐라도 해야 한다.

지난주 국회에 가서 양당 원내대표를 만나 국회의원들께도 기업인들의 어려움을 전달했다. 정부가 교착 상태이니 의원 외교로라도 좋은 분위기를 이어나가길 기대한다.

―오는 9월 1일 열리는 한일 간 최대 규모 문화교류 행사 '한일축제한마당'의 총책임을 맡고 있는데, 예정대로 진행될 수 있는가.

▷성사되는 방향으로 추진하고 있다. 아직 한 달 남았으니 지켜보자. 일본 측과도 이 문제에 대해 같이 노력해보자는 데 대해 공감대가 이뤄졌다. 문화 교류를 통해 민간 차원에서도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으로 본다. 정재계 등 한일 양국 간에 다각도로 노력하고 있지만 외교적 노력으로 마지막 정리가 돼야 한다.

―국민의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거세지고 정치인들도 반일 감정을 부추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일 교류가 제대로 이뤄질 수 있을까.

▷지난 50년간 일하면서 사업적으로 친밀한 관계인 일본인이 많다. 흔히 일본 사람은 겉 다르고 속 다르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친해지면 자료도 건네주고 집으로 초대해 집들이도 하고 그런다.

친일파라는 말은 8·15 광복 전부터 있던 말인데 우리는 아직도 이러고 있다. 우리도 좀 더 시각을 넓혀야 한다.

―한일 기업인들 관계는 여전히 좋은 편이라는 말인가.

▷몇 해 전 한 글로벌 포럼에서 아베 신조 총리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무뚝뚝한 스타일이었다. 반면에 아소 다로 부총리는 활발해 보였다. 아소 부총리가 당시 몇 살이냐고 물어봐서 1939년생이라고 했더니, 본인은 1940년생이라더라. 옆에 서 있던 일본상공회의소장이 1938년생이라고 해서 다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일본 기업인들은 한국에서 회의를 한다고 하면 아침 비행기를 타고와 오후 10시 비행기로 돌아가곤 했다. 자기 집에 가면 새벽 1~2시가 되는데도 한국에서 하는 회의에 빠지지 않고 오던 이들이다.

이럴 때일수록 양국 정부와 기업이 힘을 보태서 풀어나가야 한다. 기업이 적극적으로 정부를 도와야 하지 않겠나.

―한국 경제에 외환 못지않게 내우도 심각하다. 이 와중에 하투(夏鬪) 얘기까지 나오고 노동계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우리나라 노동 문제는 국가 경제 발전에 매우 큰 걸림돌이다. 일본보다 대립적인 노사 관계를 유지하는 한 일본을 이길 수 없다.

지난해 경총 회장을 맡으면서 목표로 삼은 게 시간이 걸리더라도 노사 대타협을 이루자는 것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그동안 양대 노총도 수없이 만나 얘기를 나눴지만 결코 쉬운 과제는 아니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다.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 우리 경제를 살리는 데 다른 길은 없다.

―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도 정기국회 때 비준동의를 받으면 법 개정 추진과 함께 곧 도입될 분위기다. 경총은 ILO 기본협약 비준에 지속적으로 반대해 왔던 이유가 있나.

▷지난 6월 ILO 총회 때 스위스 제네바에 직접 가서 이 문제를 설명했다. 유럽연합(EU)은 8년 전 한·EU 자유무역협정(FTA)이 타결될 때 ILO 기본협약을 비준해주기로 하고 안 해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내년에 해보겠다고 하면서 벌써 8년째 미뤄왔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당시 노력하겠다고 했지, 비준하겠다고 확약한 적은 없다. 그리고 안 한다고 해서 양국 교역에 있어 우리나라가 불리해지는 FTA 조항도 없다.

매년 노사 관계가 개선될 것이라는 큰 기대감을 갖고 '내년엔 비준될 수 있겠지'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해마다 더 나빠지고 있다. 불법 집회와 폭력까지 발생하는 서울 거리를 보면 EU에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겠나. 지금 과연 한국이 ILO 기본협약을 비준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런 점을 주한 EU대사 등을 찾아다니며 일일이 설명해줬다.

―경총 회장으로 부임한 후 1년 반이 지났는데 정부와 관계는 어떤가. 집권 초 친노동 정부 시각에 변화가 좀 있다고 느끼나.

▷180도로 바뀌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계속 대화를 이어가고 합의점을 찾아가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대화가 단절되거나 협상 채널이 없어지거나 하지는 않는다. 정부 쪽에서도 그동안 인사 변동이 있지 않았나. 그동안 우리도 경영계 입장을 지속적으로 설명하고 설득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정부와 경영계가 서로 경청하는 관계다.

"정부정책 변화 기대…우리경제 달라질 것"

매일경제

―반기업 정서는 갈수록 더 심해지는 듯하다.

▷과거에는 기업들이 위법한 행위를 하거나 탈세 등을 해서 생겨났는데, 지금은 그런 건 거의 없다. 촘촘한 법망을 피해 고의로 법을 어기려는 기업은 없을 것이다. 다만 같은 법 조항을 가지고 해석을 다르게 하는 것뿐이다.

기업들은 지난 30년간 크게 바뀌었다. 상법, 공정거래법 등이 바뀌면서 기업 경영 관행도 그에 맞춰 개선돼왔다. 하지만 노사관계법은 그대로다.

노동운동이 거세졌던 88올림픽 이후나 지금이나 바뀐 게 없다. 그런데도 기업들을 질책하다 보면 기업인들은 기가 죽을 수밖에 없다. 기업이 신나서 일하고 투자를 늘려야 일자리가 많이 생기는데 그게 안 된다.

―미·중 무역전쟁 파고도 거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세계무역기구(WTO)에서 한국 개도국 지위를 박탈해야 한다고 했다. 이래저래 한국만 치이는 느낌이다.

▷세계는 이미 엄중한 무역전쟁 속에 있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이 와중에 일본의 무역 규제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터진 것이다. 기업들이 소재 독립이 어렵다는 문제를 몰랐을 리 없다. 하지만 당장 원료 생산공장을 지을 수도 없고 기술적으로도 그동안 한국이 많이 부족했다. 이번 규제가 우리 기업에 좋은 계기가 됐으면 한다. 원료를 개발하고 원천기술을 쌓는 데 좀 더 신경 써야 한다. 정부도 그동안 기업을 옭아맸던 화학물안전관리법(화관법)·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 등 규제를 확실히 풀어줘야 한다. 선택근로제·탄력근로제도 마찬가지다. 소재 연구개발(R&D)을 해야 하는데 근로시간을 맞추다 보면 할 수 있는 게 없다.

―요즘 세계 경제·글로벌 증시가 호황을 누리는데 한국만 예외다. 경제 정책에서 가장 큰 실책은 무엇이었을까.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이다. 지난 2년간 29% 올랐다고 하지만 주휴수당까지 합치면 사실은 그보다 훨씬 높은 수준으로 오른 것이다.

이 때문에 최저임금제 개선을 얘기한 것이다. 최저임금제가 생긴 지 근 30년이 지나도록 제도는 안 바뀌고 매년 인상폭만 바뀌고 있다. 앞으로 최저임금은 일률적으로 할 게 아니라 업종별, 지역별, 기업 규모별로 달리해야 한다.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이나 불공정 채용 방지법 등 각종 법 규정이 생겨나면서 기업하기 더 힘들어진다는 말이 나온다.

▷직원을 채용할 때 '아버지 뭐 하시냐'고 묻는 것 등은 미국에서도 불법이다. 다만 괴롭힘 방지법도 그렇고 모든 문제를 법으로 규정하려는 게 문제다. 인생을 너무 꽉 조일 필요는 없는데. 상식에 입각해서 해야지.

―최근 경제 상황이 금융위기 때보다 더 안 좋다는 경영자들도 있다. 경영계 원로로서 조언한다면.

▷주식시장이나 기업 이익 등 숫자를 보면 안 좋아지는 게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가다 보면 경제 정책에도 곧 변화가 있지 않겠나.

어느 정권이나 이상과 이념이 있다. 문재인정부도 서민과 노동자 등을 보호하고자 하는 이념이 있었으니 집권이 가능하지 않았겠나.

앞서 노무현 대통령도 경제를 잘 이끄신 분이고, 김대중 대통령도 어려운 시기에 큰일을 하셨던 분이다. 문 대통령도 공약을 내서 당선됐으니 하루아침에 공약을 폐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책도 조금씩 변화해갈 수 있는 것이다. 나라를 이끌다 보면 부진한 정책은 조금씩 변화시키고 그러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 경제도 그런 면에서 조금씩 달라질 것이라고 본다. 인내심을 갖고 지켜보자.

손경식 회장은…

△1939년 서울 출생 △1957년 경기고 졸업 △1961년 서울대 법학과 졸업 △1961년 한일은행 입사 △1968년 삼성전자 입사 △1973년 안국화재(현 삼성화재) 이사 △1977~1991년 삼성화재 사장 △1991~1996년 삼성화재 부회장 △1993~1994년 CJ 부회장 △1994년~현재 CJ그룹 회장 △2005~2013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2018년 3월~현재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대담 = 이진우 산업부장 / 정리 = 한예경 기자 / 사진 = 김재훈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