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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권력은 공백을 허락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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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로 보는 ‘민주적 정당성’ 없는 지도자

원작 배경인 미국보다 한국에서 드라마 상황 현실화 가능성 높아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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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월화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가 7월1일부터 방영 중이다. 이 드라마는 극단적인 설정으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권력이 국민 지지에서 나온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실감 나게 보여준다. 미국 드라마 <지정생존자>를 리메이크했다.

드라마는 첫 화부터 충격적이다. 국회의사당 폭탄 테러로 대통령과 국무총리, 여당 정치인이 모두 사망한다. 권력 승계 서열 14위였던 박무진 환경부 장관(지진희)은 장관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된다. 카이스트 교수 출신으로 정치 경험이 없던 박무진은 얼떨결에 부여받은 엄청난 권한에 부담을 느끼고 혼란스러워한다.

한국은 권력승계자 모두 비선출직



원작과 리메이크작 <60일, 지정생존자>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먼저 닮은 점부터 보자. 두 드라마를 관통하는 열쇳말은 ‘민주적 정당성’이다. 국민이 투표로 뽑지 않은 사람이 국가위기 상황에서 지도자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박무진 권한대행은 힘을 가진 이들에게 끊임없이 무시당한다. 이관묵 합동참모본부 의장(최재성)은 군 통수권자인 박무진을 ‘박 대행’이라고 하대하며 권한대행의 허락 없이 군사작전을 벌이려고 한다. 캄보디아 대사는 권한대행 체제의 대한민국과 아무런 외교적 거래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강상구 서울시장(안내상)은 대선 후보로 나서기 위해 테러의 배후로 의심되는 탈북민들을 탄압한다. 박무진이 이를 막기 위해 대통령령을 발령하려 하자 한주승 비서실장(허준호)은 공식적으로 반대하며 “내가 반대하는 한 청와대 스태프들은 아무도 박 대행 편에 서지 않을 겁니다”라며 기를 꺾는다.

이런 장면들은 원작에서 교수 출신 톰 커크먼 주택도시개발부 장관(키퍼 서덜랜드)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면서 벌어지는 사태와 비슷하다. 아무리 법적 정당성이 있더라도 국민이 지도자로 인정하는 ‘민주적 정당성’이 없으면 대통령이 권한을 행사하기 힘들다.

드라마 속 상황이 현실에서 펼쳐질 가능성은 미국보다 한국에서 더 크다. 미국은 대통령 권력 승계 1순위(부통령 겸 상원의장), 2순위(하원의장), 3순위(상원 임시의장) 모두 국민이 선거로 직접 뽑은 선출직이다(4순위부터는 비선출직). 미국 역사상 2순위 이하로 승계가 이뤄진 적은 없다. 현실적으로 비선출직이 권력을 물려받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반면 한국은 1순위(국무총리), 2순위(기획재정부 장관), 3순위(교육부 장관)와 4순위 이하가 모두 비선출직이다. 따라서 민주적 정당성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대한민국 역사에 존재했던 대통령 권한대행 6명은 모두 비선출직이었다. 1960년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부통령 사임·허정 외무부 장관 권한대행, 1962년 윤보선 대통령 사임·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권한대행,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사망·최규하 국무총리 권한대행, 1980년 최규하 대통령 사임·박충훈 국무총리서리 권한대행,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고건 국무총리 권한대행,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황교안 국무총리 권한대행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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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한대행은 대통령 권한 모두 대행하나



드라마에서 박무진이 가장 큰 위기에 놓이는 순간도, 가뜩이나 취약한 민주적 정당성이 흔들릴 때다. 양진만 대통령(김갑수)은 테러로 사망하기 직전 박무진 장관에게 해임 의사를 밝혔으나, 절차를 밟기 전 사망했다. 이 사실은 한동안 드러나지 않다가 생방송 언론 인터뷰 중 온 국민에게 폭로된다.

방송 다음날 박무진 권한대행에게 법적 정당성이 있다는 법제처의 유권해석이 나온다. 하지만 민희경 국정기록비서관(백현주)은 법률 해석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국민은 박무진 권한대행에게 투표하지 않았어요. 양진만 대통령에게 투표했죠. 양 대통령의 신임이 지금의 권한대행 체제를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자 정체성이에요. 해임 사실을 통해서 우린 알게 됐죠. 양 대통령이 장관 박무진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걸. 앞으로 청와대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죠?”

박무진은 권한대행으로서 권한을 행사할 때마다 제약을 받는다. 서울시장의 탈북민 탄압을 막기 위해 대통령령을 발령하려 할 때 안세영 민정수석비서관(이도엽)은 제동을 건다. “헌법 71조에 따르면 권한대행은 대통령의 모든 권한을 물려받되 어디까지나 기존 질서, 즉 현상유지에 준한다고 명시돼 있습니다.” 대통령령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므로 권한대행이 쓸 수 없다는 의미다.

실제 헌법 제71조에는 “대통령이 궐위되거나 사고로 인하여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에는 국무총리, 법률이 정한 국무위원의 순서로 그 권한을 대행한다”라고만 적혀 있을 뿐 ‘현상유지’라는 표현은 없다. 다만 권한대행의 민주적 정당성이 부족해 ‘현상유지’만 할 수 있다는 것은 헌법학자들의 주된 시각이다.

‘한국화’ 성공한 리메이크작



원작과 <60일, 지정생존자>의 본질적인 질문은 같다. 하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미국과 한국의 정치사회적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점은 원작을 본 사람도 리메이크작에 흥미를 느끼게 하는 매력 포인트다.

우선 원작에 없는 게 있다. 전임 양진만 대통령의 존재감이다. 양 대통령은 남북 평화협정, 지방분권 등 진보적인 정책을 펼쳤으나 임기 말 지지율이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며 자신의 소신을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다. 비극적인 사고로 세상을 떠났지만 정치적 동지들은 양 대통령과 함께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그 뜻을 이어가려 한다. 자연스레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그 자리를 ‘정치인답지 않게 권력욕 없고 진정성 있는’ 박무진 권한대행이 물려받았다.

원작과 다른 전개 방식도 눈에 띈다. 원작에선 민주적 정당성 문제가 불거졌을 때 주인공이 직접 나서 정책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리메이크작에선 주인공 주변 인물이 새로운 이슈를 만들어 물타기를 한다. 정치적 거래가 자연스러운 미국과 ‘이슈를 이슈로 덮는’ 한국 상황의 차이가 여기서도 드러난다.

이 밖에 북한과 적대적 상황에 놓인 한반도의 특수성을 잘 살린 점, 이공계 출신 대통령의 ‘과학자스러운’ 행동 양식도 현실감을 더한다.

헌법의 차이 때문에 리메이크작은 앞으로 어쩔 수 없이 원작과 다른 길을 가야 한다. 원작에서 톰 커크먼은 대통령직을 승계받아 자기 정치를 해나간다. 리메이크작에서 박무진은 대통령 권한대행일 뿐이며 60일 이내에 후임자를 선거로 뽑아야 한다. 원작에서 상원과 하원의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대목은 가장 긴장감 넘치는 장면이었지만, 리메이크작에서 대통령을 새로 뽑는 일에 비할 바는 아닐 것으로 보인다.

변지민 기자 d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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