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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 (일)

“한국영화는 ‘흙수저 신화’… 다가올 100년 준비할 때죠” [차 한잔 나누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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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호 한국영화100년 기념사업 추진위 공동위원장 / 감독들, 작은 시장서 ‘수작’ 만들어 / 봉준호 감독 인문학적 소양 높아 / 돈이 검열보다 무서운 제작 현실 / 작가정신 쇠퇴… 독립영화 위태 / 국민들 문화 의식 높여야 선진국 / 정부 지원은 너무 부족해 아쉬워

“가난을 극복한 흙수저, 입지전적 인물에 비유할 수 있어요. 개천에서 용 난 거죠. 남한이란 작은 시장에서 영화를 우수하게 만드는 걸 보면 (감독들이) ‘아, 정말 천재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장호(74) 한국영화 100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은 올해 100년인 한국영화사를 ‘수저론’에 빗대 평가한다. 그도 그럴 것이, 가난했던 시절에 영화를 찍은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 올해는 이 공동위원장이 영화 ‘별들의 고향’으로 감독 데뷔한 지 45주년이다.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 출신인 그는 ‘바람 불어 좋은 날’(1980)을 시작으로 한국영화의 리얼리즘을 선도했다.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아름다운 차박물관에서 만난 그는 지난 100년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변화’를 꼽았다.

“지금은 첨단 기술에 기자재도 좋고 필름이 아닌 디지털로 만드니 얼마든지 엔지를 내며 촬영할 수 있죠. 그 격차가 너무 심해서 새로운 시대에 사는 기분이에요. 변화를 따라가야죠.”

세계일보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아름다운 차박물관에서 만난 이장호 한국영화 100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은 “지난 100년의 한국영화사는 가난을 극복한 흙수저, 입지전적 인물에 비유할 수 있다”며 영화의 기업화, 국민의 문화 의식 향상을 위한 정부의 정책 부재 등을 비판했다. 이제원 기자


반세기에 달하는 그의 영화 인생을 설명하는 키워드도 변화다. 그는 “‘바람 불어 좋은 날’이 두 번째 데뷔작, 전두환 정권의 영화진흥책에 저항해 만든 ‘바보 선언’이 세 번째 데뷔작이고, 사람의 영혼에 관심을 갖고 만든 ‘시선’이 네 번째 데뷔작”이라며 “변화를 수용한 게 내 영화 인생인 것 같다”고 했다.

한국영화 위기론에 대해서는 “돈이 검열보다 더 무섭게 영화인들을 통제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돈이 시대의 모든 환경, 그리고 우리의 정신까지 지배하는 게 큰 문제입니다. 돈의 논리로 만드는 ‘기업’ 영화, 영화의 ‘기업화’도 마찬가지죠. 이런 식으로 하다 보면 작가정신이 사라지기 때문에 영화가 결국은 멸망한다고 생각해요. 정부가 영화를 검열하던 때가 오히려 희망이 있었습니다. 검열이 감독들에게 자극이 돼 강인한 정신력을 키워 낸 부분이 있거든요.”

이 공동위원장은 독립영화가 대안영화가 될 수 있다고 보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독립영화 감독들도 인기를 얻게 되면 전부 상업영화 쪽으로 가고 싶어 하거든요. 관객들의 문화 의식도 앞서가지 않다 보니 영화를 키워 나가지 못하는 거예요. 악순환이죠. 그래서 위기라고 하는 거고. 영화인들의 의식화가 필요합니다. 영화 평론가나 영화를 아끼는 미래 영화인, 언론 등이 모여 영화 운동을 할 수 있는 두뇌 조직을 만들어야 해요.”

정부에 대한 쓴소리도 이어 갔다. 추진위원회의 예산은 15억7000만원. 지난 4월 기자회견에서 예산 부족을 호소했지만 달라진 건 없다.

“예산이 형편없이 모자랍니다. 한국영화 100년을 축하한다는 의미가 없어요. 권력이 영화, 문화를 늘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문화 의식이 높아져야 국가 경쟁력이나 위상이 높아질 텐데 문화 의식을 높이는 선도적 정책을 생각하지 않죠.”

감독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는 “책을 많이 봐야 한다. 몇 권 갖고는 안 된다”며 독서를 강조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마치 디지털 시대 영상 벌레들 같아요. 영화에서 인문학이란 걸 찾을 수가 없다고. 스마트폰이나 유튜브 동영상에만 매달리고 있으면 작가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투르게네프의 러시아 문학에 독일 교양소설이 제 기초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봉준호는 요즘 젊은 감독들과 달리 인문학적 소양이 상당해요. 매번 영화의 깊이와 넓이가 다르지. 봉준호가 동심은 저와 비슷한데 저보다 훌륭한 건 인문학에서 나온 건지, 아니면 외국 영화를 많이 봐서 그런지 다중성이 있다는 겁니다. 영화를 만드는 캐릭터가 그 안에 다 있잖아요. 악인을 잘 그려야 하는데 전 좀 약하거든요.(웃음)”

오는 10월27일 영화의 날을 기점으로 기념사업이 끝난 뒤에도 앞으로의 100년을 위한 명맥을 이어 갔으면 하는 게 그의 꿈이다.

“100주년이 아닌 100년이라 말하는 건 향후 100년을 의식한 겁니다. 방대한 조직은 아니더라도 어떤 상징적인 조직을 갖춰서 대종상영화제를 살리거나 아니면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제 하나쯤은 만들었으면 해요.”

그는 안성기가 주연하는 ‘가족의 향기’란 신작을 준비하고 있다. 고 신성일이 꼭 출연하고 싶다며 계획을 세웠던 영화다. 이 영화는 그의 다섯 번째 데뷔작이 될지 모른다.

박진영 기자 jy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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