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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4 (화)

[문화와 삶]파도여 말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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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양양은 서핑의 새로운 성지다. 수도권에서의 접근이 용이하고, 초보자와 고수 모두에게 적합한 파도가 있기 때문이다. 마니아의 문화였던 서핑이 양양이 발견된 후 새로운 해양문화가 됐다. 양양 서핑의 중심지는 죽도해변이다. 한적한 어촌이었던 이곳은 몇 년 사이 렌털숍과 스쿨, 아기자기한 카페와 펍으로 가득한 ‘힙 플레이스’가 됐다. 맛집이나 술집 같은 유흥업에 의해 뜬 동네와 문화나 예술로 인해 발전하는 동네의 차이는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현상을 기록하려는 자의 유무다. 양양은 후자다.

경향신문

죽도해변에서 인구해변으로 넘어가다보면 검은색 3층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눈에 띄는 로고가 있다. WSB 팜 서프 매거진(WSB Farm Surf Magazine: 이하 WSB). 면사무소와 파출소가 있는, 나름 지역의 중심지지만 ‘매거진’이라는 명칭이 낯선 게 사실이다. WSB를 가장 간단하게 정의하자면 서핑 플랫폼회사다. 2016년과 이듬해 여름마다 2권의 무크지를 발간했고 서핑을 좋아하는 뮤지션들이 참가한 콤필레이션 앨범 <파도타러 가는 7번 국도>를 제작했다. 이 ‘잡지사’의 핵심 인력은 두 명, 한동훈 대표와 장래홍 편집장이다. 서핑대회에서 만난 둘은 본래 타지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의기투합하여 서핑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로 하고 2013년 양양으로 내려와 사무실을 차렸다. 때마침 서핑이 곧 붐을 타기 시작했다. 서핑을 하려는 사람들은 늘어나고 그들을 가르치는 숍과 스쿨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말하자면 문화가 움튼 것이다. 하지만 서핑을 다루는 전문지도 없고, 서퍼들과 공유할 수 있는 매체도 없었다. 기록되지 않는 유행은 기억으로만 남는 법. 그래서 무크지를 만들었다. 가이드북이자 서핑문화의 기록지다. 국내외의 서핑 스폿, 서핑에 목숨을 건 이들의 인터뷰, 그리고 초보자부터 숙련자까지 커버하는 서핑 가이드 등 서핑과 관련된 거의 모든 콘텐츠가 담겨 있다. 한 대표와 장 편집장을 포함, 공식 스태프는 네 명에 불과한데 사진, 필자, 일러스트, 번역까지 참여한 인원은 웬만한 메이저 잡지에 뒤지지 않는다. 그만큼 서퍼들의 커뮤니티가 탄탄하다는 증거다.

무크지와 음반 같은 아날로그 매체만 낸 게 아니다. WSB를 주목하는 이유는 그들이 운영하는 동명의 홈페이지와 애플리케이션(앱) 때문이다. 인터뷰, 스폿 소개 등이 있는 ‘서프 TV’ ‘스폿 가이드’ ‘서핑 레슨’ 등 다양한 서핑 콘텐츠를 동영상으로 제공하는 이 앱의 핵심은 국내에서 처음 시도하고 있는 라이브 웹캠이다. 국내 해변 23곳에 HD 웹카메라를 설치하고 파도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스트리밍한다. “타지에서 살고 있는 서퍼들은 현지의 지인들을 통해서만 서핑 가능 여부를 알 수 있었다. 그러다보면 파도가 좋다고 해서 달려왔는데 ‘낚시’인 경우도 생긴다. 지인이 없으면 기상청 예보만 보고 확인할 수 있다. 기상청 예보에 파도 정보는 없다.” 장 편집장의 말이다. 이 웹캠은 보다 정확한 서핑을 가능케 했다. 당일로 서핑을 즐기는 경우 출발 전 아예 어느 스폿의 파도가 좋은지 확인한 후 행선지를 정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각 기상 스타트업과 제휴, 스폿마다 파도차트를 제공한다. 일출과 일몰 시간은 물론이고, 시간대별로 바람의 방향과 속도, 초당 파도의 높이, 물때까지 서핑에 필요한 꼼꼼한 정보를 제공한다. 파도는 사람의 뜻대로 만들 수 없지만, WSB를 통해 최소한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만들어졌다. “서핑을 통해 알게 된 지인은 평일에도 늘 우리 홈페이지를 띄워놓고 파도 치는 모습을 바라본다고 하더라. 꼭 서핑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ASMR처럼 활용한다고 하더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폭풍이 몰아치든, 사무실에서건 고속도로에서건 WSB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바다에 데려다 놓는다. 서핑문화를 모으고 엮어 지금을 기록하고, 기술을 활용하여 미래를 바꾼다. 몇 년 사이 죽도해변의 땅값은 수직상승했다. 젠트리피케이션의 파도가 밀려온다. 하지만 WSB는 ‘문화와 기술’이 교차하는 또 다른 파도를 만들고 있다. 이 파도가 젠트리피케이션을 피해 새로운 바다로 나아갈 수 있기를 응원한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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