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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5 (토)

[김지석 칼럼] ‘아베의 일본’이라는 낡은 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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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의 일본은 낡은 질서를 상징한다. 몇년 뒤 동아시아에서는 이전과 전혀 다른 새 질서가 나타날 수 있다. 이번 경제전쟁 또한 그 흐름 속에 있다. 협상은 필요하지만, 힘들더라도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길을 가야 한다. 일본이 다시는 비슷한 무기를 꺼내지 못하도록 우리 역량을 강화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한겨레

김지석
대기자


해방 이후 한-일 관계의 역사에서 이런 적은 없었다. 일방적으로 상대의 목줄을 죄려는 것 말이다. 그것도 식민지배의 가해자이자 만년 무역 흑자국인 일본이 그렇게 하고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경제전쟁 도발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행태를 빼닮았다. 우선 장점을 앞세운 선제 충격요법으로 상대의 기를 꺾으려 한다. 세계 최대 시장을 가진 미국은 수입 관세 인상, 일본은 수출 통제다. 세계무역기구(WTO)로 대변되는 국제 통상규범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점도 같다. ‘내가 하는 행동이 바로 국제규범’이라는 식이다.

이를 합리화하려고 둘 다 앞뒤 안 맞는 안보 논리를 동원한다. 미국이 안보를 자의적으로 정의해 경제전쟁의 도구로 삼는 것은 패권국의 횡포지만, 각국은 미국의 말을 무시하기 어렵다. 하지만 일본이 대북제재 문제를 수출규제 이유로 끌어들인 것은 ‘숭어가 뛰니 망둥이도 뛰는’ 격이다. 경제전쟁을 국내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정치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 역시 동일하다. 특히 아베는 남북한을 돌아가며 공격하는 구태의연한 색깔론을 정치 기반의 하나로 삼고 있다.

두 사람의 목표는 비슷한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범주에서는 같지만 내용은 차이가 있다. 나라의 위상과 중장기적 지향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베의 목표는 크게 둘이다. 하나는 우리의 정책을 바꾸거나 현 정부의 힘을 약화하는 것이다. 정책의 핵심은 일본 쪽 표현으로 ‘1965년 체제의 유지’다. 일본에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 일제 식민지배와 관련한 과거사 문제가 더는 제기되지 않고, 이웃 나라와의 관계가 자국 중심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말한다. 아직 해결되지 못한 일본군 위안부나 강제징용자 개별 배상 문제 등을 언급하는 것조차 막고, 자신한테 동조하는 세력과만 손을 잡겠다는 뜻이다. 나아가 아베를 포함한 일본 우익은 한국의 정권이 자신과 손발이 맞는 이들로 교체되기를 바란다.

상대 나라의 정책 변경과 집권세력의 약화를 꾀하는 것은 트럼프도 마찬가지지만, 좀 더 분명하게 눈에 보이는 미국의 이익에 초점을 맞춘다. 미국 내 일자리를 늘리는 ‘일자리 중상주의’와 무역 역조 개선이 그것이다.

다른 하나는 구조와 체제의 재편이다. 아베는 동북아에서도 일본 몫이 줄어드는 구조를 바꾸려 한다. 한때 세계 총생산의 15%를 넘보던 일본 경제는 이제 6%로 떨어졌다. 중국의 총생산이 일본의 2.5배가 넘고, 한국은 1인당 소득에서 일본의 80% 선에 접근했다.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비롯한 안보 사안에선 일본의 존재감이 더 약하다. 이런 흐름을 뒤집기 위한 아베의 첫 공격 대상이 한국이다. 한국을 길들여 자신의 하위 파트너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다.

아베의 경제전쟁 도발은 미국의 중국 공격에 보조를 맞춘 것이기도 하다. ‘미·일 대 중국’이라는 대결 구도 강화다. 중국을 주저앉히려는 미국은 일본이 충실한 하위 동맹국으로서 강해지는 것을 지지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기존의 한-미-일 삼각동맹 구도가 약해지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미국은 삼각동맹이 손상되지 않는 한 일본의 경제전쟁 도발에 개입할 동기가 약하다.

일본이 내부 불안을 전가하고 새 국제 체제를 시도하기 위해 한반도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서세동점의 물결이 거셌던 19세기 후반이 그랬고, 오랜 내전을 거친 통일 이후 무사들이 넘쳐났던 16세기 말이 그랬다. 일본 우익세력은 지금도 그때를 그리워한다.

근대 이후 세계는 35~45년마다 시대 교체를 경험하고 있다.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냉전 이후 시기를 필자는 ‘신자유주의-남북(대결) 시대’라고 이름 붙인 바 있다. 이 시대는 세계무역기구가 출범한 1995년까지의 정착기와 2008년 세계경제위기 때까지의 발전기를 거쳐, 지금까지 재편기를 지나고 있다. 재편기의 열쇳말은 버락 오바마 미국 정부의 아시아 중심축 정책과 트럼프 정부의 미국 우선주의다.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일본은 북을 대표하는 기득권 세력이며, 남의 큰손인 중국은 이에 도전한다. 일본의 경제전쟁 도발은 한국을 기득권 위협 세력으로 간주하고 힘으로 누르려는 것이다.

아베의 일본은 낡은 질서를 상징한다. 몇년 뒤 동아시아에서는 이전과 전혀 다른 새 질서가 나타날 수 있다. 이번 경제전쟁 또한 그 흐름 속에 있다. 협상은 필요하지만, 힘들더라도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길을 가야 한다. 일본이 다시는 비슷한 무기를 꺼내지 못하도록 우리 역량을 강화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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