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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금)

MBC 계약직 아나운서들 ‘직장내 괴롭힘’ 진정서 낸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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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오전 9시, 서울고용노동청 본청 앞에 MBC 계약직 아나운서 7명이 모였다. 이날부터 시행된 ‘직장내 괴롭힘 방지법‘ 진정을 곧바로 접수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기자회견을 마치자마자 진정서를 제출했다.

이들은 지난 5월 27일부터 MBC에 다시 출근하기 시작했다. 2016~2017년 입사했다가 새 경영진이 들어선 이후 계약해지됐고, 법적 공방 끝에 중앙노동위원회에서 부당 해고 판정, 법원에서 근로자 지위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업무가 없다. 출근은 9층 아나운서실이 아닌 12층 콘텐츠부서 옆 회의실로 한다. 지난 12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MBC 사옥에서 경향신문과 만난 아나운서들은 “회사에서는 우리가 출근하지 않아도 상관 없다는 입장이다. 근태 관리도 안 해준다. 사내 인트라넷에 접속 못 하니 뉴스 체크도 제대로 못 한다. 포털사이트에서 뉴스를 검색해 방송 연습한다”며 “노동의 문제인데 회사에서는 아직도 우리를 정치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이 시행된 16일 MBC 계약직 아나운서들이 중구 서울고용청 앞에서 이 법에 근거한 진정서 제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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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 출근 6시 퇴근, 그런데 할 일이 없다”

아나운서들의 법률대리를 맡고 있는 류하경 변호사는 “계약직 아나운서들을 격리된 공간에 배치하고, 업무를 주지 않는 행위, 사내 전산망에 접속할 수 없도록 한 일 등이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고용노동부는 정당한 이유 없이 훈련·승진·보상·일상적인 대우 등을 차별, 근로계약서 등에 명시돼 있지 않은 허드렛일만 시키거나 일을 거의 주지 않음, 업무에 필요한 비품(컴퓨터·전화 등)을 주지 않거나, 인터넷·사내 네트워크 접속을 차단함 등을 직장 내 괴롭힘 행위 예시로 들고 있다.

MBC는 2016년과 2017년 안광한·김장겸 전 사장 재직시절 계약직 아나운서 11명을 뽑았다. 2017년 12월 최승호 사장이 취임하며 경영진이 교체됐다. 아나운서들이 그간 전 경영진에게 수없이 들었던 ‘정규직화’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회사는 이들에게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이들은 지난 3월 서울서부지법에 해고무효 확인 소송과 함께 근로자지위 가처분 신청을 냈다. 가처분 재판부는 “근로계약이 갱신되리라는 정당한 기대권이 인정되는 경우 사용자가 근로계약 갱신을 거절하는 것은 부당해고와 마찬가지로 아무 효력이 없다”며 “해고무효확인 사건의 판결 선고 시까지 채권자들(아나운서)이 채무자(MBC)에 대한 근로자의 지위에 있음을 임시로 정한다”는 인용 결정을 내렸다. 본안 소송은 현재 진행 중이다. MBC는 본안 소송이 확정될 때까지 이들에게 업무를 주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아나운서들은 지난 5월27일부터 MBC 상암 사옥으로 출근했다. 복직한 7명 중 한 명인 이선영 아나운서(31)는 “사원증을 받고 회사에 다시 왔을 때는 정말 기뻤다”며 “두 달여가 다 돼가는데 지금은 조금씩 우울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 아나운서는 “9시에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하고 있지만 회사에서 업무를 주지 않으니 할 일이 없다. 외국어 공부도 하고 자기계발을 한다지만 한계가 있다”며 “20대 중후반에서 30대 초반 젊은이들이 한창 일해야 하는 시간을 방치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힘들다”고 말했다.

■일부에서 ‘적폐’라고 부르는 것 알고 있어…“계약직이었을 뿐”

이들은 자신들의 복직 문제가 노동의 문제로 다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경영진과 현 경영진 사이에 이념적·감정적으로 상당한 격차가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2017년 노조가 파업에 들어갔을 때 함께하지 못했다는 미안함은 선배들에게 대자보 등을 통해 전했다. 이 아나운서는 “선배들의 파업 뜻에 공감했지만, 계약직이라는 현실에 함께 할 수가 없었다”며 “파업 이후 회사에 대자보나 편지를 등을 통해 미안함을 전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적폐 세력’이라고 매도당하는 현실도 알고 있었다. 이 아나운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인사 조치를 할 수 있을 만큼 힘이 있던 사람이면 모르겠지만, 그저 신입사원일 뿐이었다”며 “오히려 하기 싫은 방송도 회사가 시키면 계약직이기 때문에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정말 적폐라면 이렇게 억울하지 않을 것 같다. 우리는 그저 취직이 하고 싶었던 수천명 아나운서 지망생의 한 명일 뿐이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오히려 ‘계약직’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이 지난 경영진에게 이용당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머무는 12층 작은 방은 원래 다른 부서의 회의실이었다. 이곳에 임시로 7명분의 책상과 컴퓨터를 설치한 상태다. 회사에서 배척되는 상황을 느끼다 보니 움직임도 소극적으로 된 사람도 있다. 한 아나운서는 “사람들을 마주치는 게 힘들어서 공용 엘리베이터는 잘 타지 않는다. 선배들과 마주치면 그분들도 당황하는 게 느껴진다”며 “회사 내 편의 시설도 잘 이용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복직 소송과 언론 인터뷰, 노동부에 진정서를 내는 등의 행동은 노동자로서 권리를 찾기 위한 일이지만 이것이 누군가에게는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 아나운서는 “초기에 우리가 회사 앞에서 시위를 할 때 자유한국당 의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장을 내기도 했다”며 “우리는 진영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기 위해 더 노력했던 것 같다. 우리의 복직 문제는 결국 노동의 관점에서 ‘옳고 그름’을 파악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고희진 기자 go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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