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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조동호의 내 인생의 책]①즐거운 일기 - 최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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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과 마주하는 법

경향신문

최승자의 시는 너무 아프다. 너무 아파서 외면하고 싶었다.

소월(素月)의 ‘서정’이나 미당(未堂)의 ‘실존’, 혹은 동인지 반시(反詩)의 ‘대중(大衆)’ 사이에서 서성거리던 치기어린 문학청년에게 최승자의 ‘절망’은 문자 그대로 절망이었다. 그녀의 시 어느 것 하나 희망적인 것이 없었고, 긍정적인 것이 없었다. 예컨대,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일찌기 나는’ 중에서)

실제로 당시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광주사태’를 일으킨 자가 ‘정의구현’을 내걸고 대통령이 되던 시절이었다.

시대도 암울했지만 홀어머니에 하숙집 외아들이던 내 미래는 더 암울했다. 가난은 우리 세대 모두의 것이었지만, 나는 많이 더 가난했다. 나야말로 ‘곰팡이’에 ‘오줌 자국’이었고, 살아날 가망성이 없는 ‘시체’에 불과했다. 굳이 절망을 확인시켜 더 큰 절망으로 떨어뜨리던 그녀의 시들.

그러나 그녀의 두 번째 시집 <즐거운 일기>를 보면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

절망은 회피한다고 사라지지 않고, 기교로 가릴 수도 없으며, 절망의 저 끝까지 도달한 후에야 비로소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을. 인생이란 간단치 않아서 그렇게 쉽게 혹은 절로 해결되는 일은 없다는 것을.

그러면서 최승자의 시는 고통스럽지만 세상과 마주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중에서)

그래서, 그나마 내가 지나온 시간의 곱이곱이 무른 진흙들 가운데 차돌 같은 단단함이 더러 섞여 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그녀의 덕이다.

조동호 |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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