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30 (화)

[매경이 만난 사람] `영업하는 CEO` 유인택 예술의전당 사장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매일경제

26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사무실에서 유인택 사장이 예술의전당 공공 예산 증대를 위한 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예술의전당]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유인택 예술의전당 사장(64)에겐 카드단말기가 두 개 있다. 하나는 사장 집무실에 있고, 하나는 손수 들고 다니는 것이라고 한다. 지난달 26일 오후 5시께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집무실에서 만난 유 사장에게 "여기서 처음 단말기를 쓴 손님이 누구냐"고 물으니 그가 껄껄 웃었다.

"3시에 업무보고차 만난 박양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61)이다. 박 장관은 예술경영 전문가다. 나는 펀딩 전문가 출신이고. 공공부문 예산 얘기를 꺼내면서 골드회원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걸 가만히 듣던 장관이 개인 카드를 꺼내더니 바로 결제를 해주더라.(웃음)"

지난 4월 취임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이처럼 말했다. "내 임기가 끝나는 2022년까지 연회비 10만원을 내는 골드회원 10만명을 모집하겠다." 예술의전당 국고보조율을 기존 25%(120억원)에서 50%(200억원)까지 보강하겠다는 발언 이후 나온 얘기였다. 공공재정 확보와 더불어 민간 후원까지 최대한 끌어들이겠다는 것이었다.

"취임사 핵심은 기승전'돈'이었다. 세간에서는 아직도 나를 민예총(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출신 '좌파·진보 예술인',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 '화려한 휴가'(2007)를 기획·제작한 사람이라며 '좌파 프레임'을 씌운다. 이래 봬도 난 시장경제주의자다. 1980년대 군부독재시대엔 당대의 시대적 과제가 있었던 것이고, 민예총은 1989년에 1년 몸담은 게 전부다."

그는 대학교 연극반 활동으로 문화계에 첫발을 디뎠다. 서울대 제약학과 2학년 시절 마당극을 접하며 그의 표현대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이후 극단 연우무대 사무국장 등을 거쳐 1990년대 한국영화계를 선도했다. 당시 그가 자임한 역할은 대개 '돈'과 '시장'으로 수렴됐다. 문화를 '산업'으로 인식한 한국영화 '1세대 프로듀서'로서 영화 기획·제작의 최전선에는 늘 그가 있었다. 영화 제작사 '기획시대' 대표로 한국 기획영화 제작의 효시격인 '결혼이야기' '미스터 맘마'부터 '화려한 휴가' '너에게 나를 보낸다' '목포는 항구다' 등 다양한 스펙트럼의 영화를 제작했다. 2000년대 중반 이후로는 뮤지컬로 저변을 넓혔고, 청강문화산업대 뮤지컬스쿨 교수(2010년) 등을 역임했다. 창작뮤지컬 '구름빵' '화려한 휴가' '광화문 연가' 등은 그가 펀딩을 맡아 완성한 것이다.

유 사장은 "다른 건 몰라도 돈 끌어오는 일엔 일가견이 있다"며 "예술의전당이라는 대한민국 최고 문화 예술 기관에서 그 장기를 십분 발휘하겠다"고 했다.

―예술의전당(이하 예당) 신임 사장 취임 직후 이런 말을 남겼다. "여기가 내 예술 인생의 종착역인 것 같다. 40여 년 예술계에서 쌓은 경험과 노하우를 여기에 모두 쏟아붓겠다."

▷한마디로 '돈 끌어오겠다'는 얘기다. 어느 예술기관이나 대놓고 말하지 못할 뿐 돈이 제일 중요하다. 그동안 문화계 안팎으로 쌓은 네트워크로 이메일 주소만 6000개가 넘는다. 고교·대학 인맥부터 사회에서 쌓은 네트워크를 총동원하면 연회비 10만원 골드회원 10만명 모집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난해 예당의 1년 예산 447억원 중 국고지원금은 119억원(25%)에 불과했다. 328억원(75%)을 자체사업(대관료, 주차료, 임대사업 등)으로 채운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국고지원금이 25% 수준에 그친 이유가 뭔가.

▷박 장관께도 보고 드린 사항이다. 예당은 국립이 아닌 민간법인으로 출범했다. 재정 구조가 애초에 그리 설계된 거다. 그게 관행처럼 30년간 이어졌는데, 그러다보니 공공재정부문이 지나치게 취약하다. 국립오페라단은 1년 예산 120억원 중 80억원이 국고보조금인 데 반해, 오페라뿐 아니라 국내 최대 미술 전시장, 뮤지컬·연극 공연장, 클래식 공연장 등을 모두 갖춘 예당은 지난해 국고지원금이 119억원에 불과했다. 개선이 시급한 이유다.

―과거에 공공 예산과 관련해 가시적 성과를 본 예가 있나. 그러고 보니 친형이 유인태 국회 사무총장(71)이기도 한데.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이 제2대 문화관광부 장관이던 시절 영화진흥기금 확보(1700억원대)에 나름대로 역할을 했다. 박근혜정권 때엔 뮤지컬 투자펀드를 150억원 끌어왔고, 한국문화예술인연합회 예산도 70억원대에서 120억원대로 올렸다. 그때가 19대 국회 후반기였고 형이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의원이었다. 문화계의 어려운 현황에 대해 틈나는 대로 적극 의견을 냈다.

―대기업 후원 이외 중소벤처기업 후원, 크라우드펀딩 등으로 민간 재원을 끌어모으겠다는 건 일종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개념의 연장 같다. 중소벤처기업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현재 진척 상황은 어떠한가.

▷한국이 개발도상국이던 시절 예술 후원의 주체는 대기업이었다. 지금 한국은 경제규모 12위,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다. 2000년대 이후 젊은 중소벤처기업인들이 참 많아졌다. 내가 볼 때 이들은 우리 세대보다 폭넓게 문화예술을 향유한 젊은 세대다. 만나는 기업인마다 그런다. "그동안 예술 분야 기부나 후원을 어디서 어떻게 하는지 몰랐다"고. 우리 예당이 이들을 위한 기부·후원 창구가 되어야 한다.

―출발은 연극이었고 이후 영화·뮤지컬까지 아우르며 대중친화적 예술과 함께했다. 평소 가까이 하지 않던 클래식 분야까지 포괄해야 하는 부담은 없나.

▷돌이켜 보면 지난 40년간 문화예술적으로 많은 혜택을 누린 세대다. 그걸 되갚는다는 차원에서 보면 예당이 가장 적합한 곳이다. 세종문화회관 서울시뮤지컬단 단장을 했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비상임위원을 1년 반 동안 경험하면서 늘 우리 예술에 대한 정책이나 지원 시스템이 현실을 못 쫓아간다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하지만 대학로 소극장에 있는 극장장(예당 사장 임명 전 동양예술극장 대표로 일했다.)이 정책 건의를 한다고 먹히겠나. 그러나 예당이면 다르다. 위상이 다르니 백마디 말보다 하나의 실천적 결과물을 보여줄 수 있다.

―민중 예술 출신으로서 클래식 예술에 대한 편견 같은 건 없었나. 귀족·상류 계층 예술이다, 티켓 가격이 비싸 서민에겐 접근성이 떨어진다 같은.

▷전혀. 절대 '탓'을 하면 안 된다. 가격 문제가 아니다. 어떤 분야든 재미있고 몰입감 있으면 본다. 연극도 재미만 있으면 8만원이어도 보러들 간다. 영화 '기생충'도 몰입감이 좋으니 얼마나 많이 봤나. 난 예술에 계급은 없다고 본다. 서민 예술, 귀족 예술이 따로 있는 시대가 아니다. 클래식 음악도 이제는 TV나 스마트폰 등으로 누구든지 향유할 수 있다. 세간에선 내가 예당 사장이 되니 기존 클래식 예술도 하향평준화되는 거 아니냐고 하는데, 천만에. 나는 다만 클래식이 고급예술이라는 편견을 없애고 이 분야를 더 많은 국민이 향유할 수 있게 할 생각이다.

―'기생충'을 언급했는데, 1세대 한국영화 프로듀서 출신으로서 '기생충'의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에 대한 소회가 남달랐을 듯하다.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것의 연장선에서.

▷구세대인 나로선 상상 못할 일이 벌어졌다. '기생충'은 두 번 봤다. 봉준호 감독은 대중적인 장르영화 감독이면서 예술적 성취까지 이룬 대단한 분이다.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중성과 예술성은 상충한다는 고정관념을 깬 거니까. 이미 세계를 휘어잡은 BTS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내 시선에 한국 예술계에는 그 낡은 관념이 여전히 뿌리 깊어 보인다. 순수 예술 쪽은 특히나. 이제는 좀 인식이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매일경제

■ "청년시절부터 오페라와 친해지도록"
순수예술에 대한 문턱 낮춰 초·중·고부터 즐기게 할 것

―어떤 식으로 말인가.

▷오페라를 예로 들자. 르네상스 말기인 1597년에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동했다. 엄밀히 말해 정통 오페라는 이탈리아 무형문화재다. 한국의 판소리처럼. 문제는 이걸 이탈리아 젊은이들이 잘 안 본다는 거다. 우리도 그렇다. 젊은이들이 국악 공연을 잘 보러 가지 않는다. 그러다 판소리는 드라마와 스토리를 넣은 창극으로 돌파구를 찾았다. 오페라도 영국과 미국으로 가면서 온 대중이 즐길 수 있는 뮤지컬을 탄생시켰고. 정리하자면 원형에 대한 집착을 내려놔야 한다. 현대화가 필요하다. 무형문화재에 대한 보존과 함께 현대적 계승 작업을 더 적극적으로 해나가야 한다. 난 BTS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 있다고 본다. 이들은 미국 팝 영향을 받았으나 우리 말, 우리 정서를 가미해 전 세계를 사로잡고 있다. 클래식도 BTS처럼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어린 세대의 클래식 접근성도 높아져야겠다.

▷그렇다. 적어도 미래 세대는 성년이 되기 전에 교향악이 뭔지, 오페라와 발레가 뭔지를 경험해야 한다. 최근에 조희연 서울시교육청 교육감을 찾아가 얘기했다. 예당은 재정 상황이 녹록지 않으니 교육청에서 재정보조를 해달라. 전국에 있는 초·중·고교생들이 최소한 한 번쯤 오페라, 발레 같은 걸 접할 수 있게 해주자. 얘기가 잘 됐고, 내년 여름방학에 예당이 자체 기획·제작한 오페라 입문용 공연을 열기로 했다. 여름·겨울 각각 두 달씩 상업뮤지컬 대관을 해오던 걸 청소년 입문용 공연으로 바꾼 거다.

그는 스스로가 '발로 뛰는 CEO'임을 여러 번 강조했다. 카드 결제기를 들고 백방으로 뛰겠다면서 말이다. 한평생 '을'을 자처해 살았으므로, 고개 숙이는 부분은 자신 있다는 그다. 예술계 최고 '갑'으로 여겨지는 예당 대표가 이처럼 낮은 자리를 고수하려는 이유는 뭘까. 그는 "문화 예술계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싶기 때문"이라며 덧붙였다.

"아직도 예당이 '강남의 예당'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미국의 링컨센터에 버금가는 세계적 복합문화단체인데도 말이다. 이래선 안 된다. 예당의 미래 30년은 온 국민이 찾는 '대한민국의 예당'이어야 한다. 그게 전국 250여 개 공공극장의 '맞형'다운 거다. 그러려면 우선 재원이 필요하니, 백방으로 부지런히 뛰겠다.(웃음)"

▶▶취임 100일 유인택 사장은…

△1955년 서울 출생 △경복고등학교 졸업 △서울대 제약학과 졸업 △1984~1985년 극단연우무대 사무국장 △1987~1989년 예술극장 한마당 대표 △1998년 영화사 기획시대 대표 △1999~2002년 제3대 한국영화작가협회 회장 △2002년 한국문화사업포럼 공동대표 △2012~2014년 세종문화회관 제17대 서울시뮤지컬단 단장 △2012년 동양예술극장 대표

[김시균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