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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장태민의 채권포커스] 다시 제기된 디플레이션 우려와 한은의 선긋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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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금융신문 장태민 기자] 2010년대 들어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크게 낮아지면서 심심찮게 디플레이션 우려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011년 3.7%, 2012년 2.1%로 낮아지더니 2013년 들어선 1.2%대로 뚝 떨어졌다.

2014년도 소비자물가 1.2%대를 기록하면서 1%대를 탈피하지 못하자 경제학계 등 일각에서 한국의 디플레이션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이후 2015년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0.7%, 즉 상상도 하기 어려웠던 0%대로 떨어지면서 디플레이션을 염려하는 목소리는 더 높아졌다.

소비자물가는 2016년에도 0.97% 수준의 상승률을 기록한 뒤 높아졌다. 2017년 1.96%, 즉 한은의 중기물가목표인 2% 수준까지 올랐다.

하지만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해 1.52% 수준으로 낮아졌으며, 올해 들어서는 상반기에 0.6% 내외 수준을 기록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연간 소비자물가 0%대 상승률이 실현될 가능성이 커지다보니 심심찮게 디플레이션 우려를 제기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지난 2013년 이후, 즉 2010년대 중반기까지 흘러나오던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올해 들어서 다시 되살아난 것이다.

■ 중앙은행, 인플레이션 파이터는 옛말..이제 디플레 파이터되야 하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성장률과 물가 상승률이 한단계 더 낮아지면서 과거 중앙은행을 지칭하던 '인플레이션 파이터'는 이제 옛말이 된 듯하다.

오랜 기간 물가가 더 이상 못오르게 막는 게 중앙은행의 가장 주된 일처럼 여겨졌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중앙은행업(業)도 제법 변한 듯하다.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대규모 양적완화까지 실시하면서 돈을 풀었지만, 물가는 제대로 못 오르고 있다.

그리고 어느새 중앙은행들에게 디플레이션 파이터가 되라는 주문을 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우선 한국은행 금통위 내에서 조동철·신인석 위원 같은 인물들은 물가가 못 오르고 있으니 한국도 금리 인하를 지체해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지난 2014년 이후처럼 디플레이션을 걱정하는 사람까지 늘어났다.

김두언 KB증권 이코노미스트는 "오늘 나온 산업생산의 재고출하를 보면 계속해서 물건이 쌓이고 있다"면서 "결국 디플레 압력의 결과 중 하나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이날 통계청이 발표한 5월 산업활동동향 결과를 보면 제조업 재고는 전월비 0.9% 증가하고 출하는 1.4% 감소했다. 제조업 재고/출하비율은 118.5%로 전월비 2.6%p 상승했다.

■ 한은의 변함없는 '디플레이션 우려는 과장' 입장

디플레이션은 정의상 '전반적인 물가의 하락'을 의미한다. 즉 특정한 품목이나 서비스가 아니라 전반적인 물가 하락이 확산돼야 한다.

디플레이션은 '자기실현적 특성', 즉 물가 하락에 대한 기대가 반영되는 특징도 있다.

하지만 한국은행은 우선 '광범위한 확산성' 측면에서 지금의 저물가를 디플레이션 징후로 보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이번주 한국은행 물가연구팀의 방홍기 팀장·안상준 과장과 물가동향팀의 한채수 과장이 쓴 보고서 '우리경제의 디플레이션 리스크 평가'를 보면 지금의 저물가는 광범위한 확산성을 보이고 있지 않다.

이 한은 직원들은 "소비자물가지수 구성 품목중 가격하락을 주도하는 품목수의 비중은 2013년 이후 여전히 30% 이내 수준에 머물고 있어 광범위한 확산성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평가했다.

지금의 낮은 물가상승률은 상당부분 농산물, 석유류, 공공서비스 품목 가격 하락 등에 기인하고 상품, 서비스 품목 전반에 걸쳐 물가가 낮은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물가의 자기실현적(self-fulfilling) 특성도 디플레이션 가능성을 평가하는 주요 특성이지만, 이 역시 디플레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연구자들은 "기업 등 경제주체의 향후 인플레이션 추이에 대한 기대는 그들의 가격설정 행태를 통해 실제 인플레이션으로 현실화될 수 있는데, 일반인 기대인플레이션(1년)이 여전히 한은 물가목표인 2%를 상회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기대 인플레이션이 낮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2%를 웃도는 상황에서 인플레이션 하방 압력이 자기 실현적 특성에 의해 강화된다고 볼 수 없다는 게 이들의 관점이다.

디플레이션의 주요 사례인 일본 경제의 경우 1995년 디플레이션 국면으로 진입하기 이전 단기 기대인플레이션이 소비자물가 상승률과 함께 빠르게 하락하면서 실제 인플레 하방 압력으로 작용한 바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한국의 경우엔 '제도적 특이요인' 영향이 저물가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는 게 한은의 관점이다. 각종 복지 정책이나 정부의 시장 가격변수 개입 등이 물가 수치를 낮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정부는 교육분야에서 대학입학금 단계적 폐지, 고교 급식·교복·교과서 무상지원 확대 정책을 폈다. 의료분야에선 보험서비스료 인상 보류, 병원검사료·입원진료비 등 급여화 확대 정책을 추진했다. 통신 분야에선 휴대전화료 선택약정 할인폭 확대·휴대전화료 저가요금제 확대 등을 추진했다.

즉 정부가 복지를 늘리는 과정이나 시장의 가격변수에 대한 개입을 늘리는 과정을 통해 물가 상승률이 낮게 나오는 측면이 크다는 게 한은의 판단이다.

한국금융신문

자료=정부 개입 여파가 작용한 물가들, 한국은행



한편 과거 주요 디플레이션 사례의 경우 극심한 경기 침체가 동반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국내의 경기 상황이 안 좋지만, 침체 정도는 아니라는 게 한은 물가팀 사람들의 판단이다.

연구자들은 "우리경제는 향후 예상 밖 충격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전반적인 총수요가 급격히 우축될 가능성은 낮다"고 밝혔다.

한은 연구자들은 외부의 디플레이션 판단지표까지 활용해 디플레이션 우려는 과도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예컨대 물가 여건뿐만 아니라 경기상황, 자산시장 여건 등 보다 종합적인 방식으로 디플레이션 발생 가능성을 평가하는 IMF의 디플레이션 취약성 지수(DVI)를 산출해 보면 우리나라의 경우 최근까지도 계속 0.2를 하회(2018년 0.14)하고 있어 디플레이션 위험이 '매우 낮음' 단계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한편 한은은 지난 2010대 중반 일부 경제학자나 KDI 등에서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낼 때 '과장'이라는 태도를 보였었다. 2010년대 저물가 현상은 한국만의 특징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한국금융신문

자료=디플레이션 취약성 지수, 한국은행



■ 지금 디플레이션 걱정할 때일까?..견해차 적지 않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중앙은행들의 성격이 많이 달라지긴 했으나, 역사적으로 볼 때 중앙은행은 매파에 가까웠다.

오랜기간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 파이터라고 불린 이유도 높은 물가를 잡는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각에선 시대가 변해도 한은이 과거의 매파적인 눈으로만 접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증권사의 한 채권딜러는 "한은은 보수적인 조직이다. 나이든 사람들이 지금 인기 있는 가수를 모르는 것처럼 한은이 낯선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각국 중앙은행들이 저물가에 금리인하로 대응하려는 상황을 거론하기도 한다.

김두언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중앙은행들의 변화를 보면 이제는 인플레이션 보다는 오히려 디플레이션을 걱정해야 할 때"라며"올해 한국의 물가 전망도 위기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을 보일 것으로 에상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역사적으로 보면 한은은 통화완화와 재정의 조합 시기를 매번 놓쳐왔다"면서 "이번에도 이런 일이 반복될 것 같아서 염려스럽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한은 역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금리를 적극적으로 내려 2016년엔 기준금리를 1.25%까지 내린 바 있으며, 금리 인하가 경기부양 효과를 내기보다는 서울 아파트 급등 등 부작용만 키웠다는 인식도 있다.

증권사의 한 채권중개인은 "지금은 금리를 내린다고 경기가 좋아지지 않는다. 부동산만 다시 자극하게 될 것"이라며 "낮게 나오는 물가만 보고 금리나 내리자는 식의 접근은 위험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필요 이상으로 디플레이션 논란을 끌고 갈 경우 경기에 추가적인 악영향을 줄 위험성이 있다는 견해도 나온다.

방홍기 한은 물가연구팀장은 "디플레이션 관련 논란이 지속되는 경우 가계의 소비활동 이연 등 경제주체의 자기실현적 기대 경로를 통해 우리경제에 부담으로 작용할 소지가 있다는 점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장태민 기자 chang@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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