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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이지누 칼럼]‘골목’ 자체가 문화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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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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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전, 산문 한편을 탈고했다. 주제는 대략 어린 시절 살았던 집에 대한 것이었다. 원고지 100장의 짧지 않은 분량이었는데도 미처 못다 한 이야기가 지천이다. 어린 시절 한옥에 살았고 한국전쟁의 폭격을 피한 대구는 낡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좁은 골목들이 많았다. 그 집은 비가 오면 진창이 되는 흙길과 얼기설기 엮은 판자로 만든 담이 서 있던 막다른 골목의 끝집이었고 자동차는커녕 리어카 정도만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그랬으니 집은 날이 어두워지면 돌아가는 곳일 뿐 아주 많은 시간을 골목에서 보냈다. 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는 집보다 학교나 골목에서 보낸 시간이 더욱 많았기 때문일까, 집 이야기를 하다 보면 집은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골목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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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원고를 탈고하자마자 일본의 나라시(奈良市)로 향했다. 그러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4일 동안 70㎞ 남짓하게 걸었다. 그것도 나라시를 벗어나지 않고 오전 6시부터 10시 정도까지 또 오후 4시부터 7시까지만 걷고 볕이 따가운 낮 시간은 호텔에서 쉬었다. 그렇게 걸은 곳은 나라마치(奈良町)라고 부르는 골목이다. 사실 나라마치의 구역은 그리 넓지 않다. 그러나 나라마치의 역사는 골목의 길이만큼 길다.

일본은 710년 겐메이텐노(元明天皇)가 도읍지를 나라로 옮겨 헤이죠큐(平城宮)를 짓고 나라시대(奈良時代, 710~794)를 열었다. 그 후, 718년 아스카무라(明日香村)에 있던 호코지(法興寺)를 나라로 옮겨 간고지(元興寺)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호코지는 일본 최초의 가람이라고 할 수 있는 아스카데라(飛鳥寺)와 같은 곳이다. 당시 나라에는 이미 도다이지(東大寺)와 고후쿠지(興福寺) 같은 대형 사찰들이 있었으며 간고지는 그 사찰들과 다른 구역에 터를 잡았다.

후에 간고지는 두 곳으로 나뉘었는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간고지는 고쿠라쿠보(極樂坊)가 있는 곳이다. 간고지 주변은 아스카촌으로부터 옮겨 왔던 당시부터 도시계획이 시작되어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7)에 이르기까지 유지되었다. 지금도 그 골목들은 형태가 망가지지 않았는데 골목의 작은 사거리에 서면 대략 사방 골목의 끝이 보일 만큼 반듯하다. 그렇다고 굽이진 골목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골목을 만나면 고개를 갸우뚱거릴 만큼 간고지를 중심으로 펼쳐진 나라마치의 모든 골목은 먹줄을 놓은 것처럼 곧다.

골목을 걷다가 눈에 띄는 집들은 대개 에도시대에 지어진 것들이며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더불어 길의 악령을 막고 행인을 지켜 준다는 도소진(道祖神)을 비롯하여 고진도(庚申堂)와 같은 전통신앙의 흔적들도 보였다. 그렇지만 오랜 역사를 지닌 문화재들이 있다고 해서 골목이 고인 물 같지는 않았다. 숱하게 흩어져 있는 신사나 사찰과 함께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이 살아가는 흔적이 곳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드문드문 보이던 곡식이나 생선, 채소 같은 것을 파는 작은 가게와 이발소 그리고 굴뚝 높은 목욕탕은 비록 고요해 보이는 골목일지라도 아직 왕성하게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더할 나위 없는 증거였다.

그런가 하면 1994년 추석에는 중국의 후퉁(胡同)을 걸었다. 처음 간 북경이었지만 무리와 떨어져 혼자 자금성 근처를 며칠 동안 헤매고 다녔었다. 그 후, 북경에 갈 때마다 후퉁의 매력을 잊지 못해 쏘다녔고 지난해와 지지난해는 후퉁 속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며칠 묵으며 골목을 속속들이 찾아다니기도 했었다. 물론 지금의 후퉁과 1994년의 그것은 전혀 딴판이다. 당시는 그저 북경의 서민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일 뿐이었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후퉁의 면적 자체가 줄어들었고 상업적인 장소는 훨씬 더 많아졌다. 그런데 중국의 후퉁과 일본 나라마치를 하늘에서 보면 흥미롭다. 직접 하늘에 올라갈 재간은 없지만 구글 지도나 오래된 고지도는 지금은 물론 오래전부터 골목들이 바둑판처럼 반듯했음을 보여 준다. 이번에 나라마치를 찾았을 때 마침 나라마치 자료관에서 일대를 그린 고지도 특별전을 개최하고 있어서 한나절쯤은 그곳에 머물렀다.

그러한 지도들은 두 나라의 도읍이 모두 계획된 도시라는 것을 알려 준다. 그러나 일본의 골목이 중국의 골목에 비하여 더욱 반듯해 보이는 것은 골목 안에 방치된 물건들이 없이 오로지 길과 벽 그리고 전봇대만 보이기 때문이다. 중국 후퉁의 골목에는 갖은 물건들이 만만찮게 놓여 있다. 그 때문에 골목은 삐뚤빼뚤해지고 좁았다가 또 넓어져 전혀 반듯해 보이지 않는다. 비록 그렇더라도 중국은 후퉁의 가치에 대하여 이제라도 눈을 뜨고 옛 모습 그대로를 보존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500년 도읍지인 서울의 골목은 어떨까. 아무래도 우리의 유전자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는 것에 약한 것으로 보인다. 대신 있던 것을 없애 버리거나 새로운 것을 만드는 유전자는 탁월하다. 그런 유전자의 힘은 골목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사대문 주변의 골목들 중 몇 곳이 사라져 버리거나 많은 곳이 변화를 강요당하고 있다. 최근 말썽이 되었던 세운상가 주변이 그렇고 벌써 몇 년 지난 이야기지만 익선동의 요정 오진암(梧珍庵)도 헐렸다. 그 자리에 호텔이 들어섰는데 그것 하나가 주변 건물 생태계를 바꾸지는 않았을까 염려된다. 마치 늪지에 뿌리내린 관목 한 그루가 야금야금 늪을 황폐화시키듯이 말이다.

또 얼마 전 돈의문 근처에 박물관마을이 생겼다. 나는 그 마을과 붙어 있던 고등학교를 다녔다. 덕분에 일대의 골목 구석구석 모르는 곳이 없었기에 누구보다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막상 맞닥뜨린 박물관마을의 정체성이 의아하고 모호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죄 때려 부수고 새로 짓지 않았다는 정도이다. 때로 우리나라가 보여주는 미덕은 낡은 것보다 새것, 옛것보다 현대적이다 못해 미래지향적인 것을 떠받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이며, 새것은 낡고 헌것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지누 |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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