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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왜 기무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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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불법까지 감내한다”는 통수권자의 신뢰 그리고 간첩 사건 기획의 축적된 노하우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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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기무사령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이하 기무사)가 2016~2017년 촛불집회 국면에서 공안정국을 조성하기 위해 불법을 감수하며 간첩 사건을 기획해 발표하려 한 사실을 최근 <한겨레21>이 확인했다.

왜 기무사였을까. 민간 영역에 관심을 두는 순간부터 불법인 기무사와 달리 이번 간첩 사건 기획에 국가정보원이 나섰다면 수사 자체를 문제 삼기 어려웠다. 검찰이나 경찰은 말할 것도 없다. 이미 수사가 진행된 계엄령 검토 또한 기무사가 아니라 합동참모본부에서 진행했다면 내란음모 혐의와 무관했으리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고 이재수 사령관의 부임 상징적



답은 군 정보기관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시작은 1948년 군 창설과 함께 설치된 육군 정보국이다. 당시 정보국은 북한을 포함한 군사정보를 맡는 1과(전투정보과), 방첩·보안 업무를 책임지는 2과(특별조사과), 전시 특수공작을 수행하는 3과(공작과)로 구성됐다. 이는 각각 기무사, 정보사령부 등의 모태가 됐다.

이 가운데 핵심은 2과로 한국전쟁 직전의 해방공간기, 한국전쟁, 전후 시기 등을 거치며 민간 수사에 개입했다. 2과가 정보국에서 분리된 뒤 ‘빨갱이를 때려잡는다’며 정치 영역에 더 깊게 노골적으로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가 김창룡으로 대표되는 특무부대 시절이다. 이후 방첩대, 육군 보안사령부, 국군보안사령부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군 정보기관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 독재정권을 호위하는 무사 역을 내려놓지 않았다. 그리고 기무사가 탄생했다.

이런 역사는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도 반복됐다. 기무사는 국정원, 군사이버사령부보다 확인된 것만 2~3배에 이르는 대규모 댓글부대를 운용했음에도 조직이 조금도 노출되지 않았다. 이뿐만 아니다. 두 기관의 존폐를 논의할 정도로 진행된 댓글 수사 중에도 과감하게 여론 작전을 수행해 통수권자를 위한 댓글을 달면서 청와대로부터 더 큰 신임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세월호 가족 사찰이나 우파 단체 집회 지원으로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믿고 맡기면 불법까지 감내할 수 있는 통수권자 보필만을 위한 조직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박근혜 정부 들어 누나회(요직을 차지한 박지만의 육사 37기 동기생들)의 일원인 고 이재수 전 사령관의 부임은 기무사의 위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일이었다. 조현천 전 사령관 또한 비선 실세 최순실씨의 추천이 있었다는 의혹은 현재진행형이다. 조 전 사령관은 2014년 군사이버사가 내부고발자의 잇따른 폭로로 휘청일 때 사령관으로 부임해 위기를 잘 넘기면서 군사이버사 댓글 지시 혐의를 받았던 김관진 당시 청와대 안보실장의 신임까지 얻었다는 얘기도 나왔다.

물론 국정원이 실수를 연발하면서 신뢰를 잃은 것도 기무사가 전면에 나서게 된 이유가 됐다. 박근혜 정부 당시 정치 댓글, 노무현 대통령-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대화록 공개,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등 국정원에서 터져나온 사건은 정권의 정통성을 위협할 만큼 부담을 줬다. 박 대통령이 국정원에 도저히 기댈 수 없는 환경을 국정원 스스로 만든 것이다.

한 번도 확인 안 된 재일 북한 공작원



조직의 명운을 걸 만한 불법적인 간첩 사건 기획을 기무사가 스스로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기무사 사정을 잘 아는 예비역 장성들의 말을 종합하면, 기무사는 간첩 사건을 기획하는 데 다른 어떤 정보기관보다 노하우가 축적돼 있었다. 불법 간첩 사건 기획을 준비했던 2016~2017년 당시 주축을 이루는 대공 업무의 핵심 라인 상당수가 1980년대 보안사의 간첩(조작) 사건 실무자급이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과거 보안사가 1970년대 후반 이후 1980년대 말까지 기획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관련 재일동포 간첩 조작 사건은 37건이다. 이는 중앙정보부(안기부), 경찰 등과 비교해도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 그때도 군의 민간인 사찰과 수사는 불법이었다. 따라서 보안사는 혐의를 국외에서 잡은 다음 국내에서 간첩 사건을 기획하는 방식에 집중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렇게 하면 수사를 전면화하기 전까지는 민간인 불법 수사 논란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한 군 관계자는 <한겨레21>과 만나 “기무사의 불법 사찰은 무조건 처벌 대상이지만 대상이 조총련이라면 그것은 지금도 ‘그레이 존’(한쪽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집단을 뜻함)이라 사찰을 문제 삼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번에도 기무사로서는 조총련을 사찰하면서 최소한 사건 기획 단계에서 불거질 수 있는 불법성 논란을 피할 수 있다고 판단했는지 모른다.

기무사가 이번 불법적인 간첩 사건 기획에서 노린 것은 분명해 보인다. 1980년대 간첩 조작 사건이 터지면 재야·시민사회단체 등 진보 진영은 일제히 숨죽여야 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1980년 5월17일 전두환 신군부가 전국적인 계엄령을 선포한 뒤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특별수사본부가 내놓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이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끊임없이 추궁받은 것은 조총련과 연계, 광주 민주화운동의 배후 여부다. 보안사로서는 김 전 대통령이 실제 배후였는지 조총련과 연계됐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 전두환 신군부가 보안사가 만든 내란음모 기획을 발판 삼아 쿠데타의 종지부를 찍고 정권을 탈환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대통령을 만들어냈다.

실제로 재일 북한 공작원의 정체가 명확하게 드러난 경우는 드물다. 결과적으로 접촉한 그가 진짜 간첩 행위를 하기 위해 접근한 공작원이었는지 입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주장도 나온다. 김당 기자가 쓴 <시크릿파일 반역의 국정원>에 언급된 사례를 보면, 1989년부터 전국 교도소를 다니며 간첩 조작 사건 규명과 양심수 석방 운동을 해온 서준식씨는 “내국인 간첩이 일본에서 접촉했다는 재일 북한 공작원이 진짜로 공작원이었음이 입증된 예는 단 한 건도 없다”고 주장했다.

‘도로 기무사’ 오명 시달리는 안보지원사



해편(조직을 해체한 뒤 재구성함)을 통해 군사안보지원사령부로 이름을 바꾼 군 정보기관은 여전히 ‘도로 기무사’라는 오명에 시달리고 있다. 정당한 직무 범위를 조건으로 민간인 정보 수집이나 수사의 가능성을 열어뒀고, 대통령 독대 또한 부활할 여지가 남았기 때문이다.

전직 국방부 고위 관계자는 “틈만 보이면 정치에 개입하려는 기무사의 악습은 안보지원사로 이름을 바꿨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는다. 그 뿌리는 굵고 깊다”며 “개혁은 원래 근무하던 인원들이 순차적으로 모두 교체될 때까지 지속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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