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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6 (일)

[허연의 책과 지성] 알렉상드르 뒤마 (1802~1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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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첫 프랑스 출장이었는데 경유지에 마르세유가 있었다. 뛸듯이 기뻤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 때문이었다. 소설 속 무대, 그중에서도 이프섬에 가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나를 흥분시켰다. 마르세유에서 일행과 떨어져 20분 거리에 있는 이프섬을 돌아보며 소년 시절로 떠나는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감흥에 사로잡혔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소년 시절 가장 좋아했던 소설이었다. '암굴왕'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문고판을 읽었는데 소설에서 가능한 모든 극적 요소를 완벽하게 장착하고 있는 작품이었다.

누명, 배신, 고통, 반전, 부활, 복수로 이어지는 플롯은 훌륭했다. 복수가 끝나고 쿨하게 떠나는 모습까지 소설은 완벽에 가까웠다.

사실 이 플롯은 뒤마 이후 모든 대중문학의 기본 틀로 자리 잡는다. 공전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요즈음 드라마들을 보라. 뒤마가 만든 플롯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

바로 이런 폭발적인 대중성 때문에 뒤마는 문학사에서는 대접받지 못했다. 주류 문단은 지나치게 재미있는 뒤마의 소설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에 공헌한 근사한 위인만 묻힌다는 국립묘지 팡테옹에 뒤마가 안장된 것은 2002년의 일이다. 그가 죽고 130년이 지난 다음에 이뤄진 그의 안장식에는 자크 시라크 당시 대통령까지 참석했다.

오랜 세월 너무나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아왔으면서도 '진지함이 결여된 대중작가'라는 비아냥을 들으며 문학사에서 소외돼왔던 뒤마가 화려하게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그날 시라크 대통령은 "뒤마와 함께 우리의 대중적 추억과 집합적 상상력이 팡테옹에 입장하는 날"이라는 의미심장한 연설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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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마가 본격문학에서 소외됐던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뒤마는 흑인이었다. 더 자세히 말하면 프랑스인과 흑인 간 혼혈이었다. 뒤마의 할머니는 흑인이었다. 뒤마의 할아버지 앙투안은 아프리카 노예 출신 여성 마리와 결혼해 뒤마의 아버지 토마를 낳았다.

외모가 검었던 뒤마는 당시 프랑스 주류사회에 편입되기 힘든 인물이었다. 인종차별에 분노한 뒤마가 "그렇소, 내 아버지는 물라토요. 조부는 검둥이였고, 증조부는 원숭이였소"라는 절규를 작품에 쓸 정도였다.

어차피 주류사회에 들어가지 못할 바에야 내 멋대로 글을 쓰겠다는 생각이 뒤마를 사로잡았던 것 같다.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축복이 됐다. 근엄의 노예였던 주류작가들은 흉내도 내지 못할 흥미진진한 소설 '삼총사'와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썼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문학성이 없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 읽은 축약본 말고 정본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보면 그 소설의 깊이에 놀란다. 이런 대목들을 보자.

"인간의 지혜 속에 숨겨져 있는 신비로운 광맥을 파내려면 불행이라는 게 필요한 거야. 화약을 폭발시키는 데는 압력이라는 게 필요하니까."

"이 세상에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의 상태와 다른 상태의 비교만이 있을 뿐입니다. 가장 큰 불행을 경험한 자만이 가장 큰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발 빠른 문장, 인간사의 단면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캐릭터, 빈틈없는 이야기 구조 등 뒤마가 후세 이야기꾼에게 전해준 기술은 놀라운 것이었다.

지금 프랑스 문단은 망설임 없이 말한다. "19세기 가장 위대한 프랑스 작가는 뒤마"라고.

최근 '몽테크리스토성의 뒤마'라는 그의 자전적 이야기가 출간됐다고 한다. 열독해봐야겠다.

[허연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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