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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대학원생들, 주60시간 일해도 35시간만 인정…장학금도 못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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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당계약에 우는 학생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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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출연연구기관 B기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 학생연구원 A씨는 최근 근로계약을 체결한 뒤 통장에 찍힌 실수령액을 보고 깜짝 놀랐다. 50만원 정도가 갑자기 줄었기 때문이다. 월급 내역서를 보니 4대 보험 개인 부담금(20만6390원)에 취업 후 상환 조건으로 대출받은 학자금 의무 상환액과 이자(30만5323원) 등이 추가로 빠져나간 것이다. 사정을 알고 보니 학생연구원 근로계약이 문제였다.

근로계약을 체결하면 근로자로 인정받아 건강보험 등 4대 보험 적용을 받으며 초과 근무를 하면 시간외수당, 야근수당도 받고 경력에 따른 연차수당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하지만 학생 신분으로 받았던 각종 장학금이나 '취업 후 상환' 학자금 대출, 대학(원)생 전세자금 대출, 생활비 지원 등 혜택이 끊긴다. 이런 사실을 몰랐던 B씨는 "등록금 분할납부액(62만5000원)과 월세, 통신비를 빼고 나면 수중에 60만원 정도가 남는다"며 "나를 비롯한 박사과정생 대부분은 30대 초중반으로 결혼 적령기인 사람이 대부분인데 이 돈으로는 결혼은 꿈도 못 꾸는 게 현실"이라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또 다른 출연연 E기관의 박사과정 연구원 F씨는 어렵게 따낸 한국연구재단 '글로벌박사펠로십(GPF)' 장학금 수혜 혜택 때문에 근로계약 체결을 잠시 유보한 상태다. 장학금 자격 조건이 '전일제 학생 신분 유지'이기 때문이다. 근로계약을 체결하면 자격이 박탈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교육부는 형평성을 들어 이런 학생들에 대한 예외 적용은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F씨는 "장학금은 돈을 떠나 학업의 우수성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한데 출연연에서 연구하는 학생들만 차별을 받는 게 이해가 안 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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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본래 취지와는 달리 학생 피해만 키우고 있는 근로계약 체결 이후 벌어진 부작용 때문에 연구 현장의 출연연 학생연구원들이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근로계약으로 나아진 점을 체감하기 힘든 상황에서 법적인 신분만 근로자가 된 기형적인 구조로 연구는 물론 생활까지 이전보다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일례로 출연연 G기관은 모든 학생연구원의 인건비 실수령액이 감소해 근로계약 추진 과정에서 상당한 난항을 겪은 것으로 확인됐다.또 교수가 직장 상사가 돼버리면서 교수와 학생들 간 사제 관계까지 변질되고 있는 상황이다. 근로계약서에 따르면, 학생들은 일과시간(평일 오전 9시~오후 6시) 중 수강 등 근로와 무관한 시간에 대해서는 사전에 연구책임자에게 보고하고 조율해야 하는 의무가 따른다. H기관의 석사과정 연구원 I씨는 "근로자가 되면 휴가가 연간 15일이 생기는데 수업을 갈 때 교수님이 그 시간만큼 휴가를 깎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어이없는 상황이 예견된 일이었다는 게 학생들의 주장이다. 도입 초기부터 학생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2017년 당시 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 석사학위를 밟으며 UST 총학생회장을 지냈던 졸업생 박상원 씨는 "학생들과 기관 간 충돌이 이어졌지만 기관에선 '정부가 추진하는 것이니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학생들은 연구책임자나 기관에서 불이익을 받을까봐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학생들은 정부가 홍보한 것처럼 근로계약 체결로 학생들이 이전보다 더 많은 혜택과 보장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이미 국가 연구개발(R&D) 사업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연구활동종사자 상해보험'에 가입하기 때문에 실험실 사고 발생 시 부상 1000만원 이하, 후유장애 1억원 이하 실비 지급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산재가 적용되면 그 이상 금액을 보장받을 수 있고 부상과 후유장애로 근로를 하지 못하는 기간에 대한 급여 등을 보상받을 수 있지만, 이는 극히 드문 경우인 데다 비용 면에서도 별 차이가 없다.

특히 근로계약서상에서 실제 근로시간과 관계없이 주 25~35시간만 근로시간으로 인정하고 나머지는 전부 학업시간으로 규정한 데다 "초과근무는 허용하지 않는다"고 명시한 만큼 일과시간 외 시간에서 실험실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산재 적용을 받기가 원칙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정부가 고용지표를 향상시키기 위해 근로계약 의무화 제도를 도입한 게 아니냐는 논란도 일고 있다. 실제로 정부는 올해 1~4월 청년 고용률이 증가했다고 밝혔지만, 이 가운데 '전문·과학기술직' 증가 인원(1만7000명)에는 1년 단위 근로계약을 체결한 학생연구원까지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다. 박씨는 "정부가 고용지표를 높이려 근로계약을 고집했던 건지 의구심이 들 정도"라며 "진짜 문제는 위계에 따른 대학원 교수들의 갑질인데 정부는 변죽만 울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기관과 연구책임자들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정부 지원금은 없는데 인건비를 연구과제 수주로 충당해야 하는 '연구과제중심제도(PBS)' 개선은 오리무중인 데다 학생연구원 근로계약,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까지 겹치면서 인건비 부담이 고스란히 연구책임자에게 가고 있기 때문이다. C기관 연구책임자로 있는 한 선임연구원은 "연구비에서 인건비 비중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실제 연구에 쓸 수 있는 비용이 줄어들기 때문에 결국 연구를 축소하거나 학생 수를 줄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연구 현장 실정에 맞지 않는 전형적인 탁상행정"이라고 지적했다. 1년 단위 단기계약이 늘어난 것도 인건비 수요-공급 예측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기관들이 계약을 꺼리면서 학생연구원 가운데 일반 대학에서 학위과정을 밟으면서 출연연에서 인턴십 형식으로 연수를 받는 '기타연수생'은 근로계약 체결 전후 학생 수가 급격히 줄었다. 제도 도입 직전인 2017년 6월 말 출연연 기타연수생은 1302명(학부연수생 포함 1792명)이었지만, 도입 직후인 지난해 3월 말에는 1053명으로 20%가량 줄었고, 5월 17일 현재 기준으로는 887명까지 줄어든 상황이다. 일부 학생들은 재계약이 어렵다는 통보를 받고 연구 도중 연수를 포기하고 기관을 나온 사례도 있었다. 현재 근로계약을 체결한 출연연 학생연구원은 총 3327명(전체의 96%)이다.

J기관의 석사과정 연구원 K씨도 "재료가 부족해 실험을 못한다는 이야기가 연구실에 많이 나오고 있어 피부로 느껴질 정도"라며 "늘어난 인건비 부담으로 예전에는 당연하게 올렸던 출장 기안서도 '외출'로만 올리고 출장비 없이 다녀오도록 하는 연구실도 있다"고 말했다.

[송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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