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52713916 0362019052752713916 07 0701001 6.0.6-RELEASE 36 한국일보 0

단편영화 때부터 사회 풍자… ‘황금종려’ 봉준호의 이력은 남달랐다

글자크기
영화 ‘기생충’ 한국 첫 황금종려상 “배우들 없었다면 영화 못 찍었을 것”

열두 살 소년의 꿈, 38년 지나 칸에서 이뤄… “봉준호 자체가 장르” 평
한국일보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지난 25일(현지시간) 막을 내린 제72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후 열린 공식 사진촬영 행사에서 상패를 몸 앞에 두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칸=EPA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팔름도르(Palme d’Orㆍ황금종려상)……” 숨 막히는 침묵 끝에 간절히 듣고 싶었던 이름이 불려졌다. “봉준호! 기생충!” 2,000여석 규모 뤼미에르 대극장에서도, 생중계를 지켜보고 있던 프레스룸에서도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봉준호(50)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25일(현지시간) 막을 내린 제72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거머쥐었다. 한국 영화가 칸영화제 최고상을 받기는 처음이다. 한국 영화 100주년이 되는 해에 맞이한 경사라 더욱 뜻깊다.

폐막식 마지막 순간에 호명된 봉 감독은 불끈 쥔 주먹을 높이 치켜들고 기쁨을 만끽했다. 목소리는 감격에 젖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봉 감독은 “프랑스어 연설은 준비 못했지만 언제나 프랑스 영화를 보며 영감을 얻었다”며 칸영화제에 전하는 인사로 운을 뗐다. 봉 감독은 “무엇보다도 배우들이 없었다면 이 영화를 찍을 수 없었다. 특히 이 자리에 함께 해 준 가장 위대한 배우이자 동반자인 송강호 님의 소감을 듣고 싶다”면서 송강호에게 잠시 자리를 양보했다. 송강호의 눈가엔 물기가 어려 있었다. 송강호는 “인내심과 슬기로움과 열정을 가르쳐 주신 존경하는 대한민국 모든 배우들께 이 영광을 바치겠다”는 말로 벅차 오르는 기쁨을 대신했다.

봉 감독은 영화 인생을 잠시 되짚었다. “저는 그냥 열두 살 나이에 영화감독이 되기로 마음 먹었던 소심하고 어리숙한 영화광이었습니다. 이 트로피를 제 손에 만지게 될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한국일보

영화 '살인의 추억'의 배우 송강호(왼쪽)와 봉준호 감독이 녹음 작업을 지켜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봉 감독은 한국을 대표하는 젊은 영화 거장이다. 그는 시작부터 남달랐다. 단편영화로 충무로의 주목을 받았고, ‘괴물’(2006)로 8년 동안 한국 영화 최고 흥행작 타이틀을 지켰다. 평단과 대중의 지지가 동시에 따르는, 한국에선 흔치 않은 감독이다.

봉 감독은 대구에서 나고 서울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으나 영화로 대학 전공을 삼지 못했다. 연세대 사회학과에 진학해 군복무를 하다 한양대 연극영화과 재학 중 입대한 후임병 정윤철(영화 ‘말아톤’ 등 연출) 감독을 만났다. 정 감독 조언대로 제대 후 영화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한 후 한국영화아카데미에 들어가 1년 동안 영화 연출을 공부했다. 대학 시절 학보 연세춘추에 시사 만평을 그리기도 했다.

영화아카데미 시절 만든 단편영화 ‘백색인’과 ‘지리멸렬’(1994)은 충무로에 화제를 뿌렸다. ‘괴물’로 봉 감독과 1,300만 흥행을 합작해 낸 제작사 청어람의 최용배 대표가 ‘백색인’을 보고 봉 감독을 일찌감치 점 찍어 놓았을 정도다. 봉 감독은 단편영화에서도 사회비판적이었다. 공장 노동자의 잘린 손가락을 주운 화이트칼라 직장인의 무정한 행위를 통해 지식인의 허위의식을 고발(‘백색인’)하고,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언행불일치에 야유(‘지리멸렬’)를 보냈다. 아버지 지갑 속 와이셔츠 상품권을 슬쩍 해 ‘백색인’ 주연으로 연극배우 김뢰하를 캐스팅했다는 일화도 있다. 연출부 생활을 하며 시나리오 작가로도 활동했다. 지금은 유명 감독이 된 지인과 시나리오 대결을 펼쳐 최민수 정우성 주연 영화 ‘유령’(1999)의 시나리오 작업을 따내기도 했다.

봉 감독은 장편 영화 데뷔가 빠른 편이다. 31세였던 2000년 블랙코미디 ‘플란다스의 개’로 입봉했다. 사라진 개를 둘러싼 일대 소동극을 통해 한국 사회의 단면을 들췄다. 봉 감독은 개봉하면 세상이 뒤집어질 것이라고 장담했으나 박스오피스 성적은 초라했다. 관객의 기호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때 절실히 깨달았다고 봉 감독은 이후 여러 인터뷰에서 술회했다.

두 번째 영화 ‘살인의 추억’(2003)으로 단번에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한국 영화 기대주가 됐다. 1980년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독재 사회의 일그러진 면모를 그려냈다. 500만명이 넘는 관객이 관람했고, 평단의 지지까지 이끌어냈다.
한국일보

2006년 봉준호 감독이 영화 '괴물'의 개봉을 앞두고 포스터에서 재미있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일보

영화 '마더' 촬영 현장에서 봉준호 감독이 배우 김혜자와 함께 다정한 모자처럼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봉 감독은 ‘괴물’로 1,300만 관객을 모으며 ‘국민 감독’의 자리에 올랐다. ‘괴물’은 2014년 ‘명량’(1,700만명)에 의해 밀려나기 전까지 역대 한국 영화 흥행 1위를 8년 동안 지켰다. ‘괴물’은 칸국제영화제 감독주간에 초대돼 봉 감독의 해외 진출 발판 역할도 했다. 봉 감독은 세계 유명 감독들이 참여한 옴니버스 영화 ‘도쿄!’(2008)에 이어 ‘마더’로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잇달아 초대 받으며 세계가 주목하는 감독으로 발돋움했다. 봉 감독은 2011년 칸영화제가 신진 감독들을 대상으로 수여하는 황금카메라상 심사위원장을 맡아 세계 영화계에 입지를 다졌다.

‘설국열차’(2013)는 봉 감독의 연출력과 국제적 인지도를 바탕으로 기획됐다. 국내 영화 투자배급사 CJ엔터테인먼트가 주도로 만들어졌으나 ‘캡틴 아메리카’로 유명한 크리스 에번스, 영국 유명 배우 틸다 스윈튼과 제이미 벨 등이 출연하며 화제를 모았다. 2017년엔 세계 1위 온라인 스트리밍업체(OTT) 넷플릭스 제작 영화 ‘옥자’를 연출해 논란의 한가운데 서기도 했다. ‘옥자’는 같은 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으나 프랑스 극장업계의 강한 반발을 샀다. 넷플릭스는 온ㆍ오프라인 동시 공개 전략으로 당시 세계 극장업계와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었다. 칸영화제 경쟁부문 심사위원장이었던 스페인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극장에서 상영되지 않을 영화는 상을 받을 수 없다고 영화제 초반 공언해 ‘옥자’는 일찌감치 수상권에서 멀어졌다. 알모도바르 감독은 이번에 ‘페인 앤 글로리’로 칸영화제에서 ‘기생충’과 경쟁했다. 봉 감독은 의도치 않게 2년 전 빚을 갚은 셈이 됐다.
한국일보

봉준호 감독이 '옥자' 촬영 현장을 지휘하고 있다. 넷플릭스 제공


봉 감독의 영화는 장르의 특징을 가져오면서 자기 식으로 변주한다. “봉준호 자체가 장르”라는 평이 나오는 이유다. 웃음기와 냉기가 공존하는 스크린을 통해 한국 사회의 부조리, 신자유주의 사회의 아이러니와 비극을 담았다.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기생충’도 구성원이 모두 백수인 한 가족과 IT로 부를 일군 또 다른 가족의 사연을 지렛대 삼아 자본주의 계급사회의 어둠을 들춰낸다. 봉 감독은 재미와 의미를 두루 갖춘 영화들을 만들어 한국 관객이 가장 좋아하는 감독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섬세한 연출력 때문에 팬들은 그를 ‘봉테일’(봉준호와 디테일의 합성어)이라 부른다.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봉 감독의 황금종려상 수상은 K팝 분야에서 방탄소년단이 이룬 성취에 비유할 수 있다”며 “봉 감독의 황금종려상 수상을 계기로 국제 무대에서 과소 평가됐던 한국 영화의 위상이 복구될 것”이라고 수상의 의미를 짚었다. 나아가 전 평론가는 “한국 영화엔 미답의 영역이었던 미국 아카데미영화상도 곧 문이 열릴 것이라 본다”며 “‘기생충’이 한국 영화를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올려놓았다”고 평했다.

칸영화제는 올리비에르 나카체ㆍ에릭 토레다노 감독의 ‘더 스페셜즈’ 상영을 끝으로 12일간의 축제를 마쳤다. 봉 감독은 황금종려상 트로피를 품에 안고 26일 한국행 비행기에 올라 27일 낮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다. 28일에 ‘기생충’ 언론배급시사회가 열리며 마침내 30일 한국 관객과 만난다.
한국일보

[저작권 한국일보] 봉준호 감독 영화 이력. 그래픽=김경진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칸=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