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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목)

[산책자]일본의 ‘작은 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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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여행하면서 줄곧 이런 궁금증과 함께했다. 왜 집이 이렇게 작을까. 호텔에 묵어도 그렇고 에어비앤비로 일반 가정집에 묵어도 그렇다. 한결같이 작다. 그럼에도 갖출 건 다 갖추고 있다. 구석구석 공간 활용이 기가 막히다. 욕실은 한 걸음 내디딜 여유 공간도 없지만 욕탕은 갖춰져 있다. 물을 받아놓고 들어가면 꼭 목욕놀이 하는 기분이 든다.

경향신문

반면에 역사 유적을 대표하는 절들은 무척이나 크다. 나라(奈良)시에 있는 도다이지(東大寺)를 처음 봤을 때 들어가는 입구부터 그 규모에 충격을 받았다. 이곳 대불전은 동양에서 가장 큰 목조건축이라고 한다. 내부에는 높이 16m에 무게 380t의 청동대불상이 있다.

작디작은 집들을 봤을 때 ‘축소 지향의 일본인’이라는 책 제목이 떠올랐다. 부채 속에 세상을 축소해 넣고, 상자 속에 신을 조형해 넣는 나라. ‘작다’는 것과 일본은 비교적 머릿속에서 잘 연결되는 편이다. 그렇다면 종교건축은 왜 저렇게 웅대하고 거창한가.

짐작되는 이유는 있다. 과거 일본은 무사들이 다스린 나라였다. 무사의 최정점에 쇼군(將軍)이 있었고 그 아래로 봉건 다이묘와 계급이 다른 무사들이 질서정연하게 서열화되어 있었다. 무력과 무력이 매일같이 부딪치던 전국시대(戰國時代)엔 무사들의 존재감이 빛났다. 사람들은 거칠고 살기를 내뿜는 무사들을 두려워했고 주군을 위해 초개처럼 목숨을 버리는 그들을 존경했다. 그러던 무사들이 전국이 평정되고 평화가 시작되자 졸지에 모두 백수가 되었다. 유학의 영향을 받아 지배층들은 사농공상(士農工商) 중에서 ‘사’로 자신들을 자리매김하고자 했지만 중국과 조선의 ‘사’가 책을 읽는 지식인이었던 반면 일본의 무사들은 기본적으로 책을 읽지 않았다. 도쿠가와 막부 초기에 지식인들은 대개 일반 평민들 속에서 나왔다. 과거라는 시험제도가 없었던 것이 큰 원인이기도 했다. 지배층이 공부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전쟁이 없어졌으니 할 일을 찾아야 했는데 무사가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할 순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형식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일상생활의 차림새부터 걸음걸이까지 철저히 신분을 구분했다. 무사들은 밖에 나갈 때 꼭 두 자루의 칼을 지녀야 했다. 무사 집안 자제가 집 근처의 목욕탕에 칼을 한 자루만 차고 갔다가 교육을 잘못 시켰다고 그 아버지가 막부로부터 벌을 받기도 했다. 길에서 시체가 발견될 경우에도 상처보다는 그 사람의 의복을 먼저 체크하도록 근무 지침에 문서화되어 있을 정도였다.

에도시대 무사들은 주군에게 집과 봉록을 받아서 먹고살았다. 평화 시대 그들의 삶은 대체로 가난했지만 집의 외관은 사치스럽게 치장했다. 그래야 주군의 체면이 서기 때문이었다. 반면 집의 내부는 검소하고 소박했다. 내부까지 꾸밀 여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 쇼군이 지방의 다이묘들을 통제하기 위한 참근교대라는 제도가 있었다. 모든 다이묘로 하여금 가족을 에도에 남겨둔 채 1년을 단위로 에도와 번을 오가게 했다. 수백㎞의 여정을 몇 달에 걸쳐서 많게는 500명이 넘는 인원이 길에 돈을 뿌리며 다녔다. 구태훈 교수의 논문 <에도시대 무가사회의 신분과 형식>을 보면 17세기 일본에 체류했던 서양인 캠페르의 눈에 비친 참근교대의 행렬이 소개된다. 시가지를 통과할 때나 다이묘와 다이묘의 행렬이 서로 교차할 때 시종들은 매우 비정상적인 걸음걸이를 했다.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발을 거의 엉덩이에 닿을 정도로 올리고, 동시에 한쪽 팔을 앞으로 쭉 뻗기 때문에 마치 공중을 헤엄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최대한 위협적인 존재로 비치기 위해서였다. 일본 종교건축의 장대함도 어느 정도는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형식과 격식을 중시한 문화의 산물이지 않을까.

이러한 과거의 유산은 다닥다닥한 현대식 소규모 집들과 함께 어우러져 도시의 장관을 만들어낸다. 조현정 박사의 논문 <일본의 소주택과 작음의 담론>에 따르면 일본의 주택이 소규모화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였다. 봉건적 구습과 차별화된 근대적인 삶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작음’이라는 가치가 내세워졌다고 한다. 1990년대 이후엔 생태적이고 공동체 지향적인 흐름이 이 ‘작음’에 힘을 얹어주었고, 동일본 대지진 이후로는 탈전후 지향 및 내셔널리즘의 영향을 받아 이 ‘작음’에 일본적 가치라는 성격도 부여되기 시작했다. 확고하게 단단한 ‘작음’이 된 것이다. 작다는 것이 공동체의 풍경을 이루는 데는 큰 의미가 있는 듯하다. 타인의 공간과 미관을 해치지 않으면서 공간을 활용할 수 있고, 서로 조화를 이룬다. 큼직한 종교건축물은 그 사이에서 작은 집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전통의 가치를 유지한다.

강성민 |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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