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7 (토)

[문득, 궁금]수출車 수천대 실은 선박, 불 나자 문닫고 이산화탄소 배출한 이유는?

댓글 4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울산, 2100여대 수출車 실은 선박 안에서 불
이산화탄소 소화설비로 진화...61대만 전소
문 닫고 밀폐시킨 뒤, 산소 농도 낮춰 불길 잡는 원리

지난 22일 오전 10시16분쯤 울산시 북구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선적부두에 정박해 있던 화물선 안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갑판 위로는 시커먼 연기가 치솟았다. 공장에서 갓 만들어져 나온 신차(新車)들이 부두 야적장(野積場)에서 배 안으로 옮겨지고 있던 중이었다.

5만7772톤(t)급 바하마 선적 ‘플래티넘 레이(PLATINUM RAY)’ 안에는 미국으로 향할 신차 2163대가 실려 있었다.

플래티넘 레이는 총 12층으로 이뤄져 있다. 1층에서 5층까지의 화물칸에는 코나와 투싼 등 현대차 1643대와 기아차 520대 등이 고박(固縛·움직이지 않도록 붙들어 맴)된 채 자리하고 있었다. 차들의 간격은 불과 10㎝. 다닥다닥 붙은 차들에 불길이 옮겨 붙으면 자칫 큰 폭발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던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빠른 판단이 필요했다. 화물의 안전을 최대한 확보하면서 불을 끌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소방은 선주 측을 설득했고, 선박에 설치된 ‘이산화탄소 소화설비’를 사용을 결정했다. 결과적으로 2163여대의 차량이 모두 불탈 수 있었던 상황이었지만, 피해는 1층 30대, 2층 31대만 전소됐다. 2102대의 신차를 지킨 셈이다.

조선일보

지난 22일 오전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선적부두에 정박 중이던 수출 차량 이송용 대형 선박에서 불이 났다. 화재가 발생한 선박의 모습.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산화탄소 소화설비’ 덕에 피해 최소화했다
오전 10시 16분 "선박 위에 연기가 많이 난다"는 신고를 접수한 울산북부소방서가 현장으로 달려갔다. 신고 접수 4분 만에 펌프차량 등 26대와 소방 인력 103명이 부두에 도착했다. 야적장에서 배로 진입하는 통로는 5층 지점. 소방대원 3명과 배의 구조를 잘 아는 선원 1명, 총 4인이 한 조가 돼 각각 선수(船首)와 선미(船尾) 두곳으로 흩어졌고, 발화지점으로 추정되는 아래 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산소가 유입될 것을 우려해 큰 통로를 이용할 수는 없었다. 호스를 든 소방대원들은 맨홀 뚜껑보다 더 좁은 크기의 해치(hatch·선박의 승강구)를 통해서 아래로 이동했다.

연기로 가득 찬 화물칸은 깜깜했고 한치 앞도 볼 수 없었다. 3층에 다다르자 뜨거운 열기가 감지됐다. 소방 대원들은 철판으로 된 바닥을 열화상 카메라로 비췄다. 온도는 90도. 그 아래 1~2층은 더 뜨거운 상황. 소방대원들이 진입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배 안에 있는 이산화탄소 소화설비를 터트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현장 소방지휘관이 말했다.

선박 측에서는 "설비를 한번도 작동시켜본 적이 없다"며 난감해 했다. 이산화탄소(CO2) 소화설비를 작동시켰을 때 수출 차량이 손상되는 등 2차 피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외국 선적은 국내 법이 적용되지 않는 치외법권(治外法權) 지역이어서 추후 책임소재 문제가 불거질 수 있기 때문에, 선주(船主)와의 협의도 필요한 상황이었다. 소방 당국의 설득 끝에 오후 12시 48분, 선박 1~2층에 이산화탄소 소화설비를 작동시켰다.

1~2층에 투입된 인원을 모두 대피시킨뒤, 연결된 모든 문을 닫고 밀폐를 시켰다. 그리고 이산화탄소를 분출했다. 30분쯤 지났을까?. 산소가 부족해지자, 불길에 힘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이후 소방대원들이 호스를 끌고 1~2층으로 진입해 곳곳에 남은 잔불을 모두 처리했다. 오후 3시 21분, 결국 5시간만에 모든 불이 꺼졌다. 이산화탄소 소화설비 덕에 진압 시간을 단축해 더 큰 피해는 막을 수 있었다.

조선일보

지난 22일 오후 불이 꺼진 수출 차량 이송용 선박 내부를 소방대원들이 살피고 있다.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산소 농도 21%→15%로 진화…水源 확보 어려운 선박에 적합
선박에 설치된 이산화탄소 소화설비는 물을 뿜는 스프링클러와 유사한 개념이다. 천장(天障) 면에 설치된 노즐을 통해 이산화탄소 가스를 분출하는 방식이다. 이산화탄소 소화설비로 불을 끄는 원리는 간단히 말하면 ‘산소 차단’이다. 불이 잘 타기 위해서 필요한 요소 중 하나는 산소인데, 이산화탄소의 농도를 높이면 상대적으로 산소의 농도를 낮출 수 있어 불길이 사그라드는 것이다.

통상 실내 적정 산소 농도는 21%로 알려져 있다. 19% 이하로 떨어지기만 해도 사람은 질식하게 된다. 불이 난 공간을 밀폐시킨 채 이산화탄소 소화설비를 작동시키면 약 15%까지 산소 농도를 낮출 수 있다고 한다.

이때 이산화탄소 가스를 분출한 즉시 바로 방사 지점으로 들어가서는 안된다. 출입문을 열어 외부 산소가 유입되면 불길이 되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소가 부족한 공간이기 때문에 추가 인명 피해가 발생할 위험도 있다. 이날 화물선 안에서도 소방대원들은 가스 분출 후 출입구를 봉쇄한 채 약 30여분을 기다렸다. 오후 1시 20분쯤 비로소 소방대원들은 물호스를 끌고 1~2층 화물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조선일보

지난 22일 오후 불이 꺼진 수출 차량 이송용 선박 내부에 불에 탄 차량 모습.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산화탄소 소화설비는 물을 뿌려 열을 빼앗아 불을 끄는 수계 소화설비가 아닌, 산소분율을 낮춰 질식시키는 가스계 소화설비의 일종이다. 일반 화재 유형을 가리키는 A급 화재는 대부분 물로 진화하지만, 유류화재인 B급, 전기화재인 C급 화재에는 이산화탄소 소화설비가 주로 쓰인다.

최돈묵 가천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전기 화재는 물을 썼을 때 장비 등에 수손(水損) 피해가 우려될 수 있고, 유류화재의 경우 물을 썼을 때 화염면이 오히려 확대될 수 있다"며 "마치 튀김을 하던 후라이팬에 물이 닿으면 사방으로 튀는 것과 같은 원리"라고 설명했다.

다량의 물을 담아 다닐 수 없는 특성상 선박에는 이산화탄소 소화설비가 적합하다고 한다. 이영주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선박에 설치되는 소화설비의 경우 이산화탄소 외에도, 바닷물을 펌프질해 불을 끄는 수계 소화설비도 사용된다"면서도 "다만 물이 다량 유입됐을 경우 배가 가라앉을 수 있는 단점이 있다"고 했다.

[박소정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