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04 (토)

중국이 만든 제주 영리병원, ISD로 한국 겨눌까

댓글 1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경향신문

제주녹지국제병원이 들어선 헬스케어타운 전경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투자는 다 이뤄졌고, 한국과 중국 간의 자유무역협정(FTA)이라든가, 투자자-국가 소송(ISD) 이런 문제들로 갈 수 있기 때문에 허가해줬다.”

지난해 12월 원희룡 제주지사가 영리병원인 제주녹지국제병원(녹지병원)의 허가를 내주면서 한 말이다. ISD는 해외투자자가 상대국의 부당한 제도나 정책 등으로 손실이 발생할 경우 해당 정부를 상대로 국제소송을 제기해 손해배상을 받는 제도다. 원 지사의 발언은 ‘ISD’가 이미 정부·지방자치단체의 공공정책 결정 과정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일깨워줬다. 정부가 설계한 정책을 도입하고 폐기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는 의미다. 중국의 부동산업체 녹지그룹이 쥔 ISD 카드는 꺼내기도 전에 정부를 위협하고 있다.

영리병원 분쟁 ISD로 넘어가나

국내 제1호 영리병원 제주녹지국제병원이 문을 닫았다. 지난 4월 17일 제주도가 중국 녹지그룹 측이 의료법이 규정한 3개월 안에 개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녹지병원에 대한 조건부 허가를 취소했다. 이에 녹지병원 측은 지난 4월 26일 병원 노동자 50여명에게 고용 해지를 통보하는 것으로 맞받았다. 사실상 사업 철수를 선언한 셈이다. 2015년 12월 보건복지부로부터 병원 건립사업계획을 승인받은 지 3년 4개월 만에 제주 영리병원 프로젝트가 끝난 것이다.

녹지병원 철수는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분쟁의 시발점이다. 녹지그룹이 녹지병원에 투자한 금액만 780억원에 달한다. 이대로 사업에서 철수한다면 빈손으로 돌아가야 한다. 녹지그룹은 투자금에 더해 제주도의 병원 개설허가 지연으로 1000억원의 손실을 입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 녹지그룹이 진행 중인 소송은 내국인 진료를 제한한 조건부 개설허가에 반발해 제기한 ‘조건부 허가 취소’ 소송이다. 그동안 녹지그룹 측은 ‘내국인 진료도 할 수 있는 외국 의료기관을 전제로 개설허가가 진행됐다’며 제주도의 내국인 진료 제한조치에 반발해왔다.

행정소송과 별개로 현재 상황에서 녹지그룹이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 방법은 제주도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과 한국 정부에 투자손실 책임을 묻는 ISD뿐이다. 이미 녹지그룹은 공식적으로 ISD 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다. 녹지그룹 측은 지난 4월 26일 열린 ‘외국 의료기관 개설허가 취소 전 청문’에서 “제주도의 허가 취소는 한·중 FTA의 공정하고 공평한 대우(FET)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ISD를 할 수 있는 사유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누가 녹지그룹에 ISD 카드를 쥐어준 것일까. 2015년 박근혜 정부 시절, 보건복지부가 녹지병원 사업을 승인하자 각종 의혹이 제기됐다. 시민사회가 제기한 대표적인 의혹은 ‘녹지병원은 병원 운영에 필요한 의료병원 유사사업 경험이 없다’는 것과 ‘병원 설립에 내국인과 국내 의료기관들이 개입해 우회 진출했다’는 두 가지였다. 해당 의혹들은 지난 3월 녹지병원 사업계획서가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제주영리병원 철회 및 의료민영화 저지 범국민운동본부는 “정부와 제주도의 녹지병원 허가는 명백한 제주 보건의료조례 위반”이라며 “보건복지부와 원희룡 도지사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밝혔다.

경향신문

김상민 일러스트


정부가 불러들인 ISD

문제는 자격요건을 갖추지 못한 녹지그룹의 사업계획을 정부가 나서 승인했다는 점이다. 2015년 승인 당시 정진엽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해 뉴스타파와의 인터뷰에서 “복지부에서는 서류를 심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류가 이상이 없으면 승인을 안 해줄 수 없다”며 “오히려 승인을 안 해주면 이상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녹지그룹은 ‘정부에서 사업계획서를 보고 승인을 했기 때문에 우리는 투자를 했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녹지병원은 안종범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의 수첩에서도 언급된다. 수첩에는 ‘5월 25일자 VIP 지시사항’으로 ‘제주도 외국인 영리법인(병원), 국내 자본 이동’이라고 적혀 있다. 당시 박근혜 정부는 녹지병원에 국내 자본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시가 이뤄진 지 6개월 만에 보건복지부는 녹지병원 설립을 승인했다. 결국 정부의 ‘승인’이 녹지 측에 ISD의 명분을 마련해준 것이다. 김양희 대구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에서 사업계획 승인을 내준 것이 ISD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며 “녹지 측이 국내에서 영업을 계속 진행한다면 한국 정부와 각을 세우는 ISD가 부담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ISD를 피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제주도와 사업시행자인 국토교통부 산하 공기업인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의 행보도 ISD 가능성을 높인다. 녹지병원 측은 수차례 의료사업에 뜻이 없다고 주장해왔다. 지난해 2월에는 제주도에 공문을 보내 “당사는 귀 도와 JDC의 강요에 가까운 요청에 따라 헬스케어타운의 의료사업에 어쩔 수 없이 참여하게 됐다”며 의료사업 진출이 정부 측의 강요에 의해 이뤄진 것임을 강조했다. 사업 승인뿐만 아니라 사업 결정과정에도 한국 정부가 개입했다는 것이다.

실제 제주도는 2015년 발간한 자료집 <외국 의료기관 오해와 진실>에서 “외국 의료기관은 해외 의료관광객을 주대상으로 하는 의료기관이지만 내국인(도민)도 진료를 받을 수 있다”고 홍보했다. 내국인 진료는 평소 녹지그룹이 제주도에 요구해온 사안이다. 결과적으로 제주도가 녹지그룹 입장을 대변해준 셈이다.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은 “그동안 정부는 ‘중국 기업이 ISD를 걸지 않을 것이며 영리병원에 대한 ISD는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틀렸다는 게 입증됐다”며 “녹지 측은 어떤 방식으로든 ISD를 이용해 한국 정부를 압박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중 FTA 체결 당시 ISD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정부에 닿지 않았다. 오히려 정부는 ISD가 중국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를 보호해줄 것이라며 비판을 잠재웠다. 하지만 현실은 예상과 반대로 전개되고 있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로 직격타를 맞은 롯데그룹은 중국 정부를 상대로 ISD를 제기하지 못했다. 자칫 중국 시장 전체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해영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는 “많은 한국 기업이 중국 정부 조치로 피해를 입고 있지만 ISD를 통한 피해 구제는 받지 못한다”며 “한국 개별기업이 중국 정부를 상대로 싸우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중국은 우리와 입장이 다르다. 특히 녹지그룹은 중국 상하이시가 지분 51%를 보유하고 있는 국영 부동산 기업이다. 정부를 등에 업고 ISD를 제기할 만한 조건을 갖췄다. 민변 국제통상위원회 위원장인 송기호 변호사는 “ISD가 쌍방 호혜적으로 공평하게 적용될 것이라는 건 근거없는 기대에 불과하다”며 “ISD는 강자의 룰을 통해 작동한다”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최신 뉴스두고 두고 읽는 뉴스인기 무료만화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