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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한현우의 미세한 풍경] 오백나한과 블랙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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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홀 기사, 읽고 또 읽었으나 광대무변한 스케일에 기죽어

지름 1㎝ 별에서 밥벌이하는 우리, 세상만사가 지극히 하찮은데

박물관의 나한상, 고요하고 평안… 석공의 노력이 600년을 건넌 것

조선일보

한현우 논설위원


얼마 전 신문에 보도된 블랙홀 기사를 한 번 읽고 이해하기엔 과학 지식과 상상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오려두고 생각날 때마다 다시 읽었다.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니 읽고 또 읽으면 언젠가는 블랙홀에 대해 깨칠 수 있을 것이다. 대여섯 번 읽으니 '사건 지평선(event horizon)'이 뭔지 알 것 같다. 어떤 물체든지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면 영원히 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블랙홀 경계에 있을 때까지만 관측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한없이 걸어가다가 지평선을 넘어가면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듯이 말이다.

전파망원경으로 블랙홀 사진을 찍었다는데 이것은 카메라로 꽃을 찍는 것과 같은 의미인가.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하다. 우리가 보는 꽃은 꽃이 아니라 꽃이 반사한 빛이므로, 블랙홀에서 나온 전파를 잡아 그 모양과 규모, 온도를 측정할 수 있다. 이걸로 사진을 만들면 눈으로 본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

얼추 아는 척할 수 있을 것 같아도 그 광대무변한 기사 스케일에 기가 죽는 것은 여전하다. 이번에 관측한 블랙홀 지름은 400억㎞라는데 서울·뉴욕 간 거리가 약 1만㎞이므로 그보다 400만배 먼 거리다. 태양의 65억배나 되는 천체가 쪼그라들어 그만해졌다. 지구가 수축해 블랙홀이 되면 지름 1㎝가 된다. 우리는 1㎝짜리 별 안에서 입시 치르고 출퇴근하고 집값 오를까 떨어질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이 블랙홀은 지구에서 5500만 광년 떨어져 있다. 1광년이 9조4600억㎞이니까 환산하면 몇 ㎞인지 계산해 보려다 관뒀다. 내 계산기가 그런 숫자를 표시할 수 없을뿐더러 1광년도 이미 상상하기 벅차다. 그렇게 먼 곳의 그렇게 큰 블랙홀에서 나온 전파의 파장은 겨우 1.3㎜라고 한다. 그런데 이 전파를 잡아내려면 또 지구만 한 전파망원경이 필요하다. 그래서 지구 곳곳 전파망원경을 동원해 그만한 효과를 냈다.

조선일보

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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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문에서 이렇게 스펙터클하고도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적 기사는 처음 읽었다. 기사에 압도되고 활자 앞에서 주눅 들었다. 블랙홀의 중력이 얼마나 강하기에 자기 자신을 빨아들이는지는 아직도 상상할 수 없다. 나는 여전히 블랙홀에 대해 알지 못한다. 다만 인간이 아주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사실만은 또렷하게 안다.

인간이 우주에 비해 얼마나 작은지 가장 생생하게 비유한 사람은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다. 양팔을 벌려 왼쪽 손끝에서 생명체가 태어나고 오른쪽 손끝이 현재라고 했을 때, 오른 팔뚝 이두박근까지 생명체라곤 박테리아뿐이었다. 공룡은 오른 손바닥에서 생겨나 가운뎃손가락 끝마디에서 멸종한다. 호모 에렉투스와 사피엔스는 손톱 안에 들어 있다. 역사 인류, 즉 수메르인부터 석가모니·예수, 나폴레옹과 히틀러, 비틀스부터 방탄소년단까지는, 손톱 끝에 줄칼을 갖다 대는 순간 모두 먼지가 되어 사라진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블랙홀 입장에서 봤을 때 지름 1㎝짜리 별에서 벌어진 일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모든 일이 헛되고 헛되어서, 세상만사가 지극히 하찮고 가벼워졌다. 밥벌이를 하고 비타민을 챙겨 먹고 거울을 보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지난 주말 국립중앙박물관의 '영월 창령사 터 오백나한' 전시를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2001년 강원 영월군 야산에서 발굴된 나한상 317점 중 일부다. 수행으로 번뇌를 완전히 소멸시킨 사람을 나한이라고 한다. 돌에 새겨진 그 얼굴들이 하나같이 고요하고 평안했다. 족히 600년은 된 조각인데, 그 옛날 석공이 정으로 쪼고 끌로 깎아 만든 표정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절에 있는 부처들은 인위적으로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영월 산기슭에 몇 백 년 묻혀 있던 수행자들은 요즘도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얼굴이었다. 어떤 나한은 입술이 도톰하고 다른 나한은 볼이 통통하거나 이마 주름이 가득했다. 얼굴 생김생김이 제각각인 걸 보면 실제 인물들의 얼굴인 것 같다. 석공은 자신이 쪼아낸 얼굴이 훗날 스마트폰 쥔 사람들과 만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그저 당대의 일과 삶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그 결과 600년을 건너뛰어 현재의 관객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고 있다.

나한들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잡념과 번뇌가 씻겨 나가는 것 같았다. 그 얼굴들은 몇 천만 광년 떨어진 블랙홀부터 줄칼질 한 번에 사라질 인류사까지 꿰뚫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박물관에서 나오는 길에 바람이 불었다. 저녁에 뭘 먹을까 궁리하기 시작했다.

[한현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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