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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장석주의 사물극장] [99] 니체와 '타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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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889년 1월 이탈리아 토리노의 한 광장에서 한 남자가 갑자기 마부에게 채찍질을 당하는 말을 얼싸안고 울부짖었다. 그는 하숙집으로 돌아와 광란 상태로 괴이한 춤을 추고, 괴성을 지르며 거실의 피아노를 마구 두드렸다. 주인이 경찰을 불렀다. 며칠 뒤 독일에서 친구가 와 그를 바젤의 정신병원으로 데려갔다.

'영겁회귀'철학의 창안자, 위버멘슈(Übermensch·초인)의 탐구자, 여러 사상의 실험실, 삶이라는 괴물을 초극하려던 예술가, 철학자 중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는 말년을 정신병원에서 보냈다. 뇌 연화증 환자로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는 동안 어머니와 여동생이 간병했다. 1900년 8월 25일 니체는 여러 차례 정신병원을 들락날락하다가 세상을 떴다.

니체는 25세 때 박사학위도, 교수 자격도 없었지만 스위스 바젤대학에 고전 문헌학 교수로 초빙되었다. 하지만 34세 때 건강 악화로 바젤대학에 사직서를 냈다. "사는 것 자체가 끔찍한 고통"이라고 할 만큼 머리에서 발바닥까지 아프지 않은 데가 없었다. 그는 좋은 날씨와 신선한 공기를 찾아 유럽의 여러 고산 지대, 바닷가, 호숫가를 떠돌며 집필을 이어갔다.

1881년 말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다락방을 빌려 요양할 때 눈병과 두통이 악화됐다. 니체는 집필 중단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듬해 1월 덴마크제 몰링 한센 타자기를 주문했다. 이 타자기는 화려한 장식과 함께 대문자와 소문자, 숫자와 인용부호를 표기할 수 있는 키 52개가 동심원을 이루며 돌출되어 있었다.

니체는 이 문명의 도구를 받은 뒤 "타자기는 나와 같은 물건. 철로 만들어졌지"라고 흡족해했다. 이 새로운 집필 도구가 새로운 사상을 빚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믿었다. 그는 타자기 작동법을 익힌 뒤 집필을 재개했다. 하지만 타자기는 병치레하는 그의 열악한 몸같이 자주 말썽을 일으켰다.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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