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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리포트] ‘왕좌의 게임’과 美 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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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있는 자가 왕위에… 트럼프 대항마에 귀추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던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이 8번째 시즌을 끝으로 8년 만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 드라마는 웨스테로스 대륙에서 7개 왕국 연맹 국가의 통치자인 ‘철 왕좌’ 자리를 차지하려는 영웅호걸들의 무용담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버락 오바마 전 미 대통령도 170여 개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됐던 이 드라마의 열혈 팬이었다고 한다.

철 왕좌는 어린 시절 성벽에서 떠밀려 장애인이 된 브랜 스타크에게 돌아갔다. 전쟁을 끝내고, 철 왕좌의 주인을 뽑는 회의에서 티리온 라니스터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모두는 좋은 스토리를 사랑한다. ‘장애인’ 브랜보다 더 좋은 스토리를 가진 자가 누가 있겠는가. 브랜은 높은 탑에서 떨어져 더는 걸을 수 없게 되자 나는 법을 배웠고, ‘세 눈 까마귀’가 됐다. 스토리는 군대나 황금보다 사람을 결합시키는 힘이 있다.” 티리온의 이 논리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세계일보

국기연 워싱턴 특파원

정치는 스토리이다. 유권자는 스토리가 있는 정치인에게 열광한다. 부동산 개발업자이자 리얼리티 TV 쇼 호스트 출신인 트럼프는 그 누구보다 정치의 이런 속성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 트럼프가 미국 정치판에 등장한 이래 미국 언론과 유권자는 트럼프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그가 매일 같이 스토리를 홍수처럼 쏟아내기 때문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21일(현지시간) 트럼프를 ‘내레이터 총사령관’이라고 불렀다. 그는 미국뿐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일에 트위터를 이용해 끼어든다. 그는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이 불타고 있던 순간에는 “화재 진압을 위해 물탱크를 항공기로 실어 날라야 할 것 같다”고 훈수를 뒀다가 욕을 먹기도 했다. 트럼프는 야당인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새로운 주자가 등장할 때마다 ‘해설 위원’으로 나선다. 그는 24명이 뛰고 있는 민주당 후보 경선에서 ‘졸리는 조’(조 바이든 전 부통령)와 ‘미친 버니’(버니 샌더스 상원의원)가 최후의 2인으로 남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트럼프는 바이든을 ‘더듬는 조’라고 부르기도 한다. 바이든이 과도한 신체 접촉으로 ‘미투’ 논란에 휩싸인 것을 꼬집은 것이다.

WP는 “트럼프가 모든 것을 자신의 스토리와 사건으로 만들면서 주연 배우, 감독, 프로듀서, 작가 역할을 독차지한다”고 평가했다. WP는 “트럼프가 온 나라의 관심을 사로잡고 있어 그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트럼프가 워싱턴포스트를 ‘가짜 뉴스’의 대명사라고 매도하지만, 이 신문은 매일같이 A 섹션을 트럼프 관련 기사로 도배하고 있다.

2020년 대선에서 트럼프에 맞설 민주당 후보로 바이든이 부상하고 있다. 흑인 여성, 동성연애자 등 스토리가 있는 주자들은 아직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바이든은 무엇보다 스토리 측면에서 트럼프에 밀린다. 1973년부터 2009년까지 상원의원을 지냈고, 2009년부터 2017년까지 부통령을 역임한 ‘워싱턴 붙박이’의 스토리는 진부하기 이를 데 없다. 미셸 골드버그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는 “바이든 지지자들이 그를 트럼프를 물리칠 가장 안전한 카드로 여기고 있으나 그를 후보로 지명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한국에서도 ‘고졸 변호사’ 노무현, ‘샐러리맨 신화’ 이명박, ‘비운의 공주’ 박근혜 등 스토리가 있는 정치인이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렇지만 이런 스토리가 대통령의 필요조건일지 몰라도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게 역사의 교훈이다.

국기연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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