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7 (토)

[송혁기의 책상물림]영예를 누릴 수 있으려면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경향신문

옛사람들은 영욕(榮辱)에 얽매이지 않는 삶을 이상으로 여겼다. 노생이 한단에서 꾼 꿈이 오래 회자되어 온 것도 영욕의 부질없음을 상기하기 위함이다. 재상의 영예와 역적의 치욕을 번갈아 겪으며 80평생을 살았는데 깨어나 보니 조밥이 채 익기도 전이더라는 이야기다. 영욕이란 이처럼 잠깐 들었다 깨는 꿈에 지나지 않는다지만, 치욕을 피하고 영예를 얻고자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영과 욕을 낮과 밤, 추위와 더위처럼 그저 지나가는 자연현상처럼 여겼다는 일화가 숱한 제문과 비문에서 칭송의 문투로 사용되어 온 것은, 영욕에 초탈한 사람이 얼마나 드물었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영예를 추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일까? 순자(荀子)는 영욕이야말로 성왕이 내세운 기본 원칙이라고 하였다. 그는 영과 욕을 의영(義榮)과 세영(勢榮), 의욕(義辱)과 세욕(勢辱)의 넷으로 나누었다. 의영과 의욕은 자신의 언행으로 인한 영과 욕이고, 세영과 세욕은 외부 조건에 의한 영과 욕이다. 세욕은 소인뿐 아니라 군자라도 피할 수 없을 때가 있지만, 의욕은 소인에게만 해당된다. 세영은 소인도 누릴 수 있지만, 의영은 군자만이 누릴 수 있다.

퇴계 이황은 사화에 몰려 퇴출된 이연경을 두고 강호자연 가운데 의영(義榮)을 지닌 인물이라고 평했다. 권세에서 밀려난 상황임에도, 그의 온화한 얼굴과 부드러운 말투를 대하다 보면 누구든 마음이 맑아지고 생각이 명료해진다. 이익만 좇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도 이처럼 내면 깊은 곳에서 은은히 향을 발하는 이에 대한 존경은 진실의 힘을 지니고 쌓이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이황은 그가 근심 가운데 진정한 즐거움을 누렸다고 하였다.

군자에게는 의영뿐 아니라 세영도 주어질 수 있다. 사심 없는 군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영예가 주어지는 것보다 좋은 일은 없다. 다만 소인의 세영과 군자의 세영을 가르는 기준이 있다. 부끄러움과 당당함이다. 소인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기에, 그렇 게 얻은 세영을 등에 업고 떵떵거리면서도 끝내 당당할 수는 없다. 군자는 부끄러움을 알아서 할 일과 하지 않을 일을 분별하였기에, 그렇게 얻은 세영을 겸손하면서 당당하게 누릴 수 있다. 영욕에 초탈할 수 없다면, 영예를 추구하는 우리의 자세를 돌아볼 일이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최신 뉴스두고 두고 읽는 뉴스인기 무료만화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