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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공감]우리 사회 숨은 조력자 집배원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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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홀의 그림자를 보는 것은 가슴 먹먹한 일이었다. 지구로부터 5500만 광년 떨어진 처녀자리 은하단 M87에 있는 블랙홀의 그림자가 드러난 4월10일 밤, 우주의 광대함에 압도되기보다는 내가 우주의 한 존재라는 사실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론으로만 존재하던 블랙홀이 관측된 후, 나는 이 일이 가능하기까지 전 세계 과학자 200여명이 어떻게 협력했는지를 촬영해 유럽남부천문대(ESO)가 공개한 17분여 분량의 동영상을 반복해서 보았다. 몇 번을 보아도 뭉클해지는 장면은 관측에 동원된 여덟 개 사건지평선망원경(Event Horizon Telescope)에서 일하는 과학자들의 모습이었다.

경향신문

블랙홀 관측에 가장 적합한 조건은 사람이 견디기에는 가장 힘든 환경이었다. 도시의 빛이 관측을 방해하지 않도록 문명세계로부터 먼 것은 기본조건이다. 해발고도 5000m인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에서는 과학자들이 산소마스크를 쓰고 일해야 했다. 겨울이면 몇 달씩 밤이 계속되는 남극은 관측에는 최적의 입지이지만, 햇빛 없는 나날을 살아야 하는 연구진은 심리적 압박과 싸워야 했다.

특히 남극의 데이터는 다른 일곱 개 망원경에서 관측된 데이터를 최종적으로 완성하는 조각이었다. 2017년 10월경 일곱 개 망원경에서 관측된 데이터의 1차 정리가 끝났지만, 연구진은 남극 데이터가 도착하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남극에서 측정이 끝난 것은 그해 4월이었고, 페타바이트(10의 15제곱 바이트)급의 데이터는 하드디스크에 저장됐다. 그러나 2월부터 10월은 남극의 비행기 운항이 통제되는 기간. 마침내 11월 초 남극을 떠난 데이터가 미국 보스턴 MIT의 헤이스택(Haystack) 천문대에 도착한 것은 12월13일이었다.

남극 데이터가 도착한 이틀 후 연구 책임자가 연구진에 보낸 메일에는 페덱스의 배달원이 대형 화물 트럭에서 하드디스크가 담긴 나무상자들을 내리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담겨있다. 페타바이트급 데이터를 옮길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비행기, 배, 기차 그리고 자동차를 이용하는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5500만 광년 저편에 있는 블랙홀의 그림자를 인류가 볼 수 있었던 데는 안전하게 데이터를 옮긴 페덱스 배달원의 기여가 있었던 것이다.

5월12일과 13일, 불과 이틀 동안 3명의 우체국 집배원이 지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블랙홀 연구의 숨은 조력자였던 페덱스의 배달원을 떠올렸다. 세상을 떠난 세 집배원 중 두 명은 돌연사였다. 전국집배노조는 2018년 한 해에만 25명의 집배원이 안전사고, 과로사, 자살로 사망했다고 밝혀왔다.

출근길에 끝내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던 공주우체국 소속의 서른 네 살 상시계약직 집배원의 곁에는 출근 준비해둔 옷과 집배원 가방, 정규직 응시원서가 놓여 있었다. 응시원서에는 ‘행복과 기쁨을 배달하는 집배원이 되는 것이 꿈’이라는 포부가 적혀 있었다.

고인의 형이 올린 청와대 청원에는 고인의 공식 근무시간은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였지만 근무시간 안에는 도저히 하루 1200여통의 우편물 배달을 마칠 수 없어 집에서까지 우편물 분류작업을 했다는 고된 일상이 담겨있다.

우편집배원들의 업무가 과중하다는 것은 어제오늘 알려진 사실이 아니다. 우정사업본부 노사와 전문가로 구성된 ‘집배원 노동조건 개선기획추진단’이 지난해 발표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집배원들의 연간 노동시간은 2745시간이었다. 고용노동부가 집계한 임금 노동자 연평균 노동 시간인 2052시간(2016년 기준)과 비교하면 하루 8시간 노동을 한다고 했을 때 87일을 더 일한 셈이다.

메신저로 지구 반대편의 사람과도 실시간 대화가 가능하고 e메일이 우편을 대체한 지 오래인 것 같은 세상이지만, 집배원들의 일은 인터넷 시대에 오히려 늘었다. 등기나 택배처럼 사람을 직접 만나 서명을 받고 전달해야 하는 우편물을 보내거나 받아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만큼의 수고인지를 안다.

5500만 광년 저편 우주의 일도, 배달원의 노동 없이는 드러날 수 없었다. 지상에서 한 집배원이 소리 없이 사라져가는 것은, 한 우주의 상실이다.

정은령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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