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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 (일)

[하종강 칼럼] 5월 광주, 그리고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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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지금 있는 대학으로 오면서 다른 학교에서 하던 강의들을 모두 정리했지만 한 대학의 강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비리투성이 사학을 시민들이 보다 못해 몇년 동안 싸운 끝에 시립대학교로 바꾸면서 지역 사회가 요구하는 과목들을 개설하는 규정을 만들었고 그렇게 어렵사리 개설된 강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련된 강의들을 ‘자주 강좌’라고 불렀다.

지난주 수업은 한국 근현대사와 노동문제에 대한 내용으로 짜였다. 식민지 40년, 분단 70년 와중에 군사정부 30년으로 이어진 한국 근현대사가 노동문제에 끼친 영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학생 한명이 갑자기 낭패한 듯한 표정을 했다. 수업이 끝난 뒤 그 학생이 다가와 말했다. “이번 주말에 광주 망월동에 참배하는 5·18광주기행단을 모집하고 있는데, 수업 전에 홍보를 했으면 좋았을 걸 깜빡 잊고 못했어요. 다른 수업 시간에 찾아가 홍보해도 될까요?” 당연히 그렇게 해도 된다고 답하면서 나도 아차 싶었다. 해마다 5월이 되면 광주민중항쟁에 관한 내용을 수업 시간에 다루었는데, 이번 학기에는 왜 깜빡 잊었을까? 후회가 됐다.

다음 수업이 시작될 무렵 그 학생이 강의실 입구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아무래도 홍보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왜냐고 묻자 학생이 답한다. “총학생회가 주관하는 행사인데요, 지금 학우들의 총학생회에 대한 인식이 별로 안 좋은 상황이어서요. 홍보하면 오히려 역효과일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는 학생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고 눈가가 벌써 촉촉하게 젖고 있었다. 혼자 돌아가는 학생의 뒷모습이 안쓰러웠다. ‘5월 광주’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그 뜻을 기리고 다른 사람에게 진실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은 그만큼이나 갸륵하고 절실하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일이다.

매우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자면, 매년 5월이 될 때마다 나는 그렇게 많은 양심적 시민들의 관심 대상이 되는 ‘광주’가 부럽다. ‘노동’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의제임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깨어 있는 시민’들조차 그렇게 보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민노총은 한국 경제를 갉아먹는 하나의 축”이라고 발언해서 물의를 빚었다. 말 나온 김에 짚고 넘어가면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의 약칭은 ‘민주노총’이지 ‘민노총’이 아니다. 언론사와 정당 등 사회단체에 민주노총이 여러 차례 알렸지만 보수 성향의 언론이나 정치인들은 굳이 ‘민노총’이라고 부른다. 오래전부터 ‘민주’라는 단어에 대해 저항감이나 열등감을 느껴온 탓에 자신도 모르게 회피하는 경향도 있겠지만 의도적으로 그렇게 표현하는 경우도 많다. 실제 ‘민노총’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기사나 발언은 거의 대부분 민주노총을 비난하는 내용들이다.

경영자들 중 상당수는 나경원 원내대표의 그 말에 동의했을 것이다. 경영자나 보수 정치인들뿐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 중에도 민주노총에 대한 시선이 결코 곱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민주노총이 다른 나라 노동조합보다 특별히 과격하거나 잘못된 전술을 구사하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 사회의 노동문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이다.

국내 굴지의 전자회사가 지난 노동절을 맞아 서비스센터 직원들 수천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임원진의 결단이라는 미담처럼 보도되기도 했다. 실상은 서비스센터 직원들이 민주노총 금속노조에 가입하자 회사 쪽이 한국노총 노조에 가입하도록 직원들을 독려했고 그렇게 민주노총 조합원을 배제하고 진행된 협상 과정에서 미흡한 노동조건들을 미처 해결하진 못한 채 이루어진 일이었다.

지난 17~18일 이틀 연속 충남 서산의 화학공장에서 유증기가 유출돼 작업 중지 명령이 내려지고 직원과 주민 700여명이 병원 치료를 받는 사고가 발생했다. 어이없게도 저온에서 보관해야 하는 물질을 고온 탱크에 집어넣었던 것이 원인으로 밝혀졌는데, 그러한 사고가 빈발하는 이유도 숙련노동자들인 민주노총 조합원들을 현장에서 배제하느라 업무에 익숙하지 않은 대체 인력을 투입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민주노총 활동가들의 주장이다.

산술적으로도 조직 노동자 절반을 차지하고 공무원노조와 전교조를 제외하고도 조합원 수가 백만명이나 되는 민주노총을 배제하는 것은 이처럼 사회 전체에 매우 해로움을 끼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80년 5월 광주 금남로에서 수많은 귀중한 생명이 꽃잎처럼 떨어졌다. 가슴 아픈 일이다. 지금도 건설 현장에서는 해마다 수백명의 노동자들이 낙엽처럼 떨어져 생명을 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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