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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시선]혀,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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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한 가지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당신은 이 모든 걸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지금을 망치지 말고 오늘을 사세요…!”

경향신문

김혜자 선생님의 백상예술대상 시상식 수상소감을 들으며 많은 이들이 그러했듯, 나도 눈시울을 붉혔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내레이션을 인용하여 오랜 세월을 함께해준 시청자들에게 그녀의 진심을 전한 순간, ‘아… 사람의 말이 이렇게 아름다운 파장을 지닐 수 있구나’라는 걸 새삼 느꼈다.

그녀는 천생 배우다. 그러나 때로는 자연인 김혜자의 삶을 외면하고 다른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 고통이었던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는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을 겪고 있는데 촬영장에서 목젖이 보이도록 웃어야 하는 순간들 말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이러한 내면의 저항을 극복하고 ‘가짜’에 숨결을 불어넣어 ‘진짜’를 탄생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그녀의 장인정신이 시상식의 무대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녀가 덧입어야 했을 등장인물, 그 낯선 영혼의 ‘말’ 한마디에 진심을 불어넣어 시청자들의 가슴을 후벼 파던 공력이 이 순간 그녀의 ‘말’에 그대로 드러났다. 그녀의 예술혼은 배우 김혜자의 ‘말’을 ‘진짜배기’로 만들었고 시청자들에게 무한한 위로를 안겨주었다.

요즘 정치인들의 막말 퍼레이드는 마치 그녀와는 급이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듯하다.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배우들, 잔재주로 그럴듯한 연기를 하지만, ‘말’의 진심이 와닿지 않는 배우들이다. 한마디로 예술혼이 없는 배우들이다. 자신이 맡은 등장인물을 책임지지 못하고 시청자들을 정서적으로 설득하는 것도 실패한다. 오직 시청률에만 혈안이 된 막장드라마 속의 배우들을 보는 듯하다. 나도 그런 드라마에 출연한 경험이 있다. 촬영 직전 대본이 나와 허겁지겁 외워진 대사는 공중분해된다. 시끄러운 소음을 생산할 뿐이다. 세상 사람들의 귀와 마음을 지치고 허망하게 한다.

평소 즐겨 읽는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야고보서 3장 6절)

삶의 수레바퀴라는 표현은 ‘창조의 질서 속에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삶’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 몸의 작은 일부인 ‘혀’가 불의와 타협하게 되면 삶의 질서가 불살라지고 파괴된다는 의미이다.

식물마저도 거칠고 폭력적인 언어에 노출되면 시들어 죽어버리는 것이 실험으로 증명되었는데, 하물며 인간이야. 정치적 득실에 따라, 혹은 상대편이 하니 나도 한다는 식의 무책임한 막말이 정치권에서는 마치 공력인 듯 행해지고 있다. 시민들을 대변하고 공익을 추구해야 하는 정치인들이 시민들의 삶의 수레바퀴를 불태우는 일을 너나없이 벌이고 있다.

우리가 내뱉는 말은 눈에 보이진 않으나 가장 중요한 인간 정신의 투영이다. 시민사회의 정신이 망가지면 눈에 보이는 문명의 산물이 제아무리 차고 넘친다 한들, 그것을 건강하게 누릴 수 있겠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가 귀중한 줄 알아야 한다. 사람에겐 직관이라는 것이 있다. 이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이지만 우리 삶에서 많은 것들을 수행하고 평가한다.

정치인들은 날카로운 시민들의 직관적 시선이 자신들을 시청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 사회에 자극적이고 폭압적인 말, 획일화된 말들이 사라지고 일상에 지치고 힘든 시민들을 위로할 수 있는 여운이 깃든 진심 어린 ‘말들’이 살아나길 바란다.

추상미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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