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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이동혁의 풀꽃나무이야기] 온주밀감·비자란... 제주도 희귀식물들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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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은 임금님께 진상했던 귀한 과일입니다. 임금님은 신하한테조차 주지 않고 혼자 숨겨놓고 먹을 정도로 귤을 아꼈습니다. 그렇다 보니 귤나무는 제주 백성을 착취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습니다.

급기야 제주 농민은 귤나무를 보이는 대로 없애 버렸고, 그 바람에 제주도에서 재배하던 다양한 귤나무가 사라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훗날 고소득 작물이 되어 자식의 대학 자금을 벌어주는 대학나무로 불리며 호황을 맞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너무 많이 재배하면서 가격이 폭락해 애물단지 취급을 받기도 하는 것이 한국 땅에서의 귤나무의 운명입니다.

조선비즈



귤나무의 재배는 삼국시대 이전부터라고 합니다. 제주도에서 재배하던 귤나무 종류는 15종 이상이었지만 현재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제주 도련동 귤나무류’를 천연기념물 제523호로 지정해 보호합니다.

오늘날 제주도에서 재배하는 귤나무는 온주밀감으로 알려졌습니다. 중국 저장성의 원저우(온주·溫州)에서 처음 재배한 나무라서 온주밀감이라고 한답니다.

밀감(蜜柑)은 귤의 일본 발음인 ‘미깡’을 한자로 적은 것이고, 여기에서 ‘감’자를 따와 ‘감귤’이라는 국적 불명의 이름이 탄생했습니다. 온주밀감이라는 이름이 좀 낯선 편이다 보니 일반적으로 귤나무라고들 하는데 감귤로 불리기까지 하니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같은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전해진 온주밀감의 시초인 나무가 제주도 서귀포시의 ‘면형의 집’에 있습니다. 그 나무는 한라산에서 왕벚나무를 최초로 발견해 학계에 보고한 타케 신부와 관련이 있습니다.

타케 신부는 1911년에 왕벚나무 몇 그루를 일본에서 선교사 활동을 하던 포리 신부에게 보내줍니다. 포리 신부는 타케 신부와 함께 한라산에서 구상나무 표본을 수집해 세계에 알린 인물입니다.

포리 신부는 왕벚나무를 받은 답례로 온주밀감 14그루를 보내주었는데 그중 한 그루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그 나무가 최근에 시름시름 앓다가 고사 직전까지 갔다는 소식을 듣고 뒤늦게 찾아가 보았습니다. 차광막을 씌워주고 수분 증발을 막기 위해 녹화 마대로 나무를 감싸주는 등 여러 조치를 취해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무는 일단 위독한 증세가 나타나면 사람의 힘으로 되돌리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 경우가 많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미 금년 4월 4일에 고사 판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주민들이 탱자나무 묘목 두 그루를 뿌리접해서 영양분을 공급해 주고, 나무 표피에 피부 보호제를 도포했지만 정상적인 생육활동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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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 판정을 받은 온주밀감의 시초 나무



그런데 이번에 가서 보니 미라처럼 칭칭 싸맨 밑동 쪽에서 어린 가지가 비쭉 솟아나 파란 잎을 내민 것이 보였습니다. 아직 시체가 아니었던 걸까요? 기적의 현장을 보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건 뿌리접을 위해 함께 동여맨 탱자나무의 가지와 잎이었습니다.

죽은 온주밀감한테서 어린 탱자나무가 순장(殉葬)을 피해 살기 위해 삐져 나온 것 같아 좀 이상한 느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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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동여맨 탱자나무 대목에서 솟아난 가지와 잎



면형의 집에는 220년이 넘었다는 커다란 녹나무가 함께 자랍니다. 이 나무도 타케 신부가 한라산에서 가져와 심은 것으로, 언제 봐도 신령스러운 기운을 뿜어내는 나무입니다.

이 녹나무에서 나오는 장뇌유(樟腦油)로 죽어가는 환자도 살린다고 합니다. 바로 옆에서 죽어가는 온주밀감을 이 녹나무가 바라만 보지 말고 살려놓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자니 왜 그런 큰 나무에 의지해 소원을 빌게 되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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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형의 집의 녹나무



온주밀감의 시조나무가 죽어가는 이즈음 제주도에는 아이러니하게도 귤꽃 향기가 넘쳐납니다. 살아 있는 것에서는 그렇게 좋은 향기가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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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을 배경으로 꽃 핀 귤나무



그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비자란 자생지입니다. 비자란은 잎의 모양이 한문 비(非)자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항상 남획의 위기에 직면해 있는 희귀 난초다 보니 다른 나무에 있던 것을 누군가 한데 긁어모아 높은 나무에 붙여놓고 있었습니다.

그 바람에 500㎜ 대포 렌즈로 당겨 찍어보려 해도 원하는 만큼 큼지막하게 사진에 담겨지지 않았습니다. 고개 아프게 올려다보면서 그렇게 높은 곳에 비자란을 붙여놓을 수 있는 자격을 가진 분들이 누구인지 궁금했습니다.

혹시 제가 아는 분들일 수도 있으니 보호를 위해 그런 조치를 취한 것에 대해 큰 불만은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동안 잘 자라서 식구가 꽤 불어난 것 같기도 했으니 더욱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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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에 붙어 자라는 비자란



그런데 손닿는 높이에도 비자란이 있지 뭡니까? 옳다구나 하고 기뻐했지만 이내 씁쓸해졌습니다. 그 역시 저절로 자라는 게 아니라 붙여놓은 비자란이기 때문입니다. 보호가 아니라 개인적인 용도로 옮겨놓은 비자란의 발견은 아니 발견한 만 못한 일이었습니다. 부디 그런 것들이 사람의 검은 손을 타지 않고 계속 잘 남아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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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닿는 높이로 옮겨진 비자란



다음은 기생식물의 희귀종인 백양더부살이를 찾아갔습니다. 날씨가 워낙 더워져서 그런지 갈변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바닷가의 사철쑥에만 기생하는 초종용과 달리 백양더부살이는 여러 쑥 종류에 기생하는 점이 다릅니다.

그 둘을 외부형태학적인 차이점으로도 구분하는 방법이 몇 가지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이곳저곳에서 초종용과 백양더부살이를 비교해 보면 그 식별포인트가 딱 맞아떨어지지 않고 애매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즉, 생김새만으로는 그 두 종을 구분하기가 어렵더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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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 종류에 기생해서 사는 백양더부살이



그래서 다시 비교해 보려고 제주도 바닷가 쪽에서 사는 초종용을 오랜만에 찾아가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곳의 초종용은 거의 사망 직전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옛 사진을 꺼내놓고 봐도 초종용은 변이가 있다 보니 백양더부살이와 외형적으로 명백하게 구분된다고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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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의 사철쑥에만 기생해서 사는 초종용



그런데 참 우연하게도 이틀 후에 고수 중의 고수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몇 해 전에 백양더부살이와 초종용이 함께 자라는 섬이 발견되어 학계를 놀라게 했다는 전남의 그 섬에 들어가서 두 종을 확인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두 종의 분류에 대한 저의 견해를 물어왔습니다.

이리저리해서 그 둘은 외형적으로 구분하기 어렵더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더라고 했더니 자기네들도 저와 같은 견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초종용과 백양더부살이는 외형만으로는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저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라 다른 고수들도 그렇게 느꼈다면 상당히 의심스러운 것이니 분명하게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식물은 이래서 쉽지 않다는 말을 합니다. 보존은 더욱 어려운 일이어서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피뿌리풀이 사라진 아부오름에서는 실망했지만 원시적인 양치식물인 솔잎란이 잘 자라는 모습에서 위안을 받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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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적인 양치식물인 솔잎란



난초가 아니라 왜 양치식물이냐고 묻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이름만 ‘란’이지 솔잎란은 원시적인 양치식물이니까요.

이동혁 풀꽃나무칼럼니스트(freebowl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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