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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해 가는 고향마을 현실에 짙은 슬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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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일 장편소설 ‘대꽃이 피는…’ / 자식 떠나 보낸 노인들의 삶과 애환 / 연작소설 형태로 16편 이야기 담아 / 걸쭉한 사투리 섞어 정감있게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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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송은일씨가 사라져 가는 고향 마을 사람들을 7년 동안 연작소설 형태로 기록한 장편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 년’(문이당)을 펴냈다. 전작 ‘매구 할매’의 배경인 ‘금당마을’을 무대로 이 마을 고령의 노인들이 어떤 사연을 품고 어떻게 이승에서 삶을 마치는지 걸쭉한 전라도 방언과 다양한 사연들을 바탕으로 서사시처럼 펼쳐낸다. 1980년대 이문구의 농촌소설이 이농이 급속히 진행 중이던 농촌을 중계했다면 이 소설은 이미 소멸했거나 소멸의 막바지에 이른 전통적인 농촌 공동체와 사람들에 대한 조사(弔辭)처럼 읽힌다.

16개의 에피소드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첫머리는 ‘외눈이 구암댁 혹부리 아들’에 관한 사연이다. 어린시절 눈을 지치다가 언덕에서 굴러 나뭇가지에 눈 하나를 잃고 남편이 일찍 죽은 뒤에는 밤낮 모르게 일하여 아들 셋을 키웠는데 큰아들은 물놀이 갔다가 물귀신이 되고 둘째 아들은 군대 가서 총 맞아 죽었다. 셋째 아들은 공무원이 되어 잘나가는가 싶었는데 전신의 뼈마디에 혹이 돋아나는 희귀병에 걸렸다. 처자식조차 꼴을 보기 싫어해 엄마에게 세상천지에 자신이 있을 곳이 없다면서 숨겨달라고 도움을 청하는 마흔 넘은 아들의 말에 ‘마음속 뼈마다에서 혹이 돋고 피가 흘렀던’ 구암댁은 “싹 다 내불고 집으로 오니라”고 한마디 한 후 한나절을 외눈으로 울었다. 동굴 방에 숨겨놓고 지성으로 보살피던 아들과 함께 구암댁은 같은 날 저세상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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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 마을에 다니러 갈 때마다 들은 마을 사람들 이야기를 바탕으로 연작소설을 묶어낸 소설가 송은일. 그녀는 “이 소설은 임종이라는 삶의 극점에 다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라면서 “저문 시대와 도래할 시대 사이에 징검다리가 없다”고 썼다. 이제원 기자


치매기가 오락가락하는 ‘홍림당’은 하루아침에 쓰러져 이승을 떠난 금산댁의 차가운 손을 어루만지며 말한다. “뭔가에 홀려 딸려가는 것 같다. 그렇구나. 치매 걸린 내가 깜박깜박 정신을 놓듯이, 찬바람에 쓸리듯이 서늘하게 삶을 놓는 것이구나. 죽으러 가는 길이 이런 것이구나. 홀로, 아무도 없이, 뭔가에 홀린 듯이. 떠밀린 듯이.” 그녀는 “늙건 젊건 아무도 자기가 충분히 살았다고 하지 않지만 죽은 사람들을 보면 충분히 산 것 같았다”고 진술한다.

환갑잔치는 완전히 사라지고 칠순과 팔순들의 합동잔치가 관례화된 마을 잔치판에서 어느날 일흔다섯 살 병선씨는 구토를 하다가 가출해 대처의 딸 집으로 가버린다. 딸이 보기에 시집오자마자 혹독한 시집살이를 시작했고 평생 이기적인 남편 곁에서 살아온 어머니의 구토는 “모든 것에 대한 저항이자 거역이며 삶에 돌연히 찾아든 위협이자 자기 삶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였다. 다문화시대에 대처에서 살지 못하고 ‘피난’온 ‘낯빛이 검은 스물다섯 살짜리 며느리’를 거두는 춘근씨의 심사는 착잡하다. 화장품 장사로 평생 살아온 ‘피어리스댁’의 며느리는 바람난 주제에 적반하장으로 이혼을 요구하고 어린 자식들은 팽개친 채 외간남자와 브라질로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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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예전과 달리 죽음조차도 마을에서 맞지 못한다고 송은일은 탄식한다. 혼자서 못 움직이는 단계에 이르면 대부분 요양원행이다. 요양원으로 들어가는 ‘전평댁’의 하소연. “잘들 있으쇼야. 다시는 못 보겄네. 여그서 놀다가 죽고 자펐는디. 요양원 같은 디 안 가고 내 집서, 우리 동네서 픽 죽고 자펐는디, 나는 어짜까. 어짜문 쓸까.” 송은일은 “한 시대가 완전히 저물고 있다는 것, 저문 시대와 도래할 시대 사이에 징검다리가 없다는 것, 일방으로 뚫린 고속도로만 있다는 것”이라고 이 사태를 서술한다.

‘매구’란 천 년쯤 산 여우가 변해서 된다는 신비한 동물을 일컫는데 이 마을의 상징적 인물인 ‘매구 할매’는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면 누구보다 먼저 알아채고 복주머니를 전달하거나 노인들에게 변고가 생기면 떨어져 있어도 금방 감지해 도움을 청한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매구 할매는 ‘고운 도깨비의 집’이라는 이름의 ‘괴연재’를 불태우게 하고 그 자리에 자신을 화장해 묻을 것을 부탁한 뒤 생을 마감한다.

송은일은 “죽으면 아무것도 아니라지만 오래 산 인생들이 허망해서 인간이 인간을 배려하는 아름다운 인간의 본 모습을 매구 할매에게서 찾고 싶었다”면서 “이 소설에 등장하는 노인들은 모두 매구 할매 같은 큰 존재”라고 말했다. 이번 소설의 표제는 서정춘 시인의 ‘죽편’에서 따왔다. 대꽃이 피면 대숲이 고사해버린다는데 송은일은 자신의 고향 마을 대나무들도 꽃을 피우기 시작한 셈이라고 고백한다. ‘칸칸이 밤이 깊은 푸른 열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 년’이 걸린 생들의 소멸이 아득하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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