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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퍼주기 말고 ‘잘줬다’ 소리듣는 대북지원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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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쌀 지원에 공들이는 정부

북은 막말 비난에 미사일 도발

빼돌리기 막고 차관 갚게 해야

억류자 송환과 이산 상봉 필요

식량 지원 둘러싼 논란과 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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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식량농업기구와 세계식량계획 식량안보 평가팀이 황해북도 지역 협동농장을 방문해 식량 사정을 파악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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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적’이란 수식어가 붙어야 마땅할 대북 식량 지원은 무척 이념적인 코드가 됐다. 이슈로 떠오를 때마다 국민 여론을 갈라놓고 논란으로 치닫게 하곤 한다. 북한의 핵 보유나 김정은 3대 세습, 인권 문제 등과 함께 논쟁을 촉발하는 대북 관련 어젠다라 할 수 있다. 찬성·반대 측 모두 나름대로 주장과 논리가 있지만 온전한 설득력을 갖추지는 못한 게 사실이다. 대북지원에 목소리를 높이는 그룹에선 “그게 정말 제대로 배고픈 주민에게 전달되는 줄 아느냐”는 분배 투명성 비판에 속 시원한 답을 못한다. 북한에 쌀을 보내는 게 이런저런 문제가 있다며 신중론이나 반대의견을 펴는 집단에서는 “북녘 동포가 굶주리는데 너무 매정한 것 아니냐”는 읍소에 혹여 냉혈한으로 낙인될까 봐 말꼬리를 흐린다.

북한의 식량 사정이 심상치 않다는 얘기가 들려온 건 올봄 들어서면서다. 세계식량계획(WFP)이나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같은 국제기구, 일부 국내외 대북 지원단체가 입소문을 냈다. 처음엔 다소 뜻밖이란 평가가 많았다. 집권 8년차에 접어든 김정은 체제가 농업생산에 있어 일부 개선조치를 취하는 등 전향적이었고, 작황도 나쁜 편은 아니었다는 게 그간 대북 전문가들과 정부 당국 분석이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대북 식량 지원 쪽으로 마음을 굳힌 건 나흘 전 데이비드 비슬리 WFP 사무총장의 청와대 방문을 계기로 해서다. 당초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만나려던 계획을 바꿔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접견한 데서도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대북제재 국면과 북한의 이달 초 미사일 도발 때문에 분위기가 꼬인 상황임에도 결심을 굳힌 것이다. 비슬리 사무총장은 WFP가 자체적으로 파악한 북한 식량 사정을 설명하고 한국 정부의 협조를 요청했다. 문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인도적 대북 식량 지원을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말했다”는 전언으로 화답했다.

이달 초 WFP와 FAO가 공동 발표한 ‘북한의 긴급 식량안보평가’는 절박한 호소를 담고 있다. 북한의 식량 수급이 최근 10년 내 최악으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136만 톤의 외부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제임스 벨그레이브 WFP 평양사무소 대변인이 우리 언론에 전한 실상은 참혹한 수준이다. 북한 인구 2500만 명 가운데 40%가 식량부족에 시달리고 있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벨그레이브 대변인은 “주민 대부분이 쌀 같은 곡류와 김치 등 약간의 야채만을 먹을 뿐, 단백질의 경우 고기는 고사하고 계란을 1년에 2~3번 먹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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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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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북한에 쌀과 고기·계란, 신선한 푸성귀를 바리바리 실어보내야 마땅하겠지만 사정은 그리 녹록지 않다. 무엇보다 북한의 식량 상황에 대한 평가를 놓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북한 장마당의 쌀값이 안정적이고, 일부 지역에선 오히려 내린 경우까지 있다는 반론이 제기된다. 국제기구의 조사 결과를 놓고도 공신력에 의문을 보인다. 일각에선 활동이 크게 위축된 구호기구들이 대북 비즈니스 복원에 나선 것이란 곱지않은 시선까지 있다. 이들 단체의 북한 내 활동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다수의 탈북자는 북한이 지원받은 식량을 주민에게 나눠주는 모습을 연출하고는, 모니터링 단이 철수한 뒤 다시 거둬들였다고 증언한다. 대북 물자를 챙기려 평양 대동강 수해 상황을 부풀리는 사진 조작을 했다가 국제 망신을 사기도 했다.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문재인 정부가 김정은 체제의 경제상황을 지나치게 낙관 일변도로 평가해버린 후유증도 크다. 지난해 9월 평양 정상회담 때 문 대통령은 모두 발언에서 “어려운 조건에서 인민의 삶을 향상시킨 김정은 위원장의 리더십에 경의를 표하며 기대하는 바가 크다”고 찬사를 던졌다. 현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에 찬동해온 일부 북한·안보 전문가 그룹은 “트럼프의 대북제재에도 불구하고 북한 경제는 끄떡없고 전력이나 식량 사정도 좋아졌다”고 주장했다. 친북 성향의 교포인사나 논객도 평양의 밤거리 사진 등을 내보이며 마찬가지 말을 했다. 그런데 갑작스레 북한 동포들이 광범위한 기아선상에 놓였다면서 대북지원의 절박성을 호소하고 나서니 국민은 어리둥절할 뿐이다.

대북지원에 대한 북한의 부적절한 태도도 비판받아 마땅하다. 어떻게든 비판여론을 누그러뜨리고 쌀 지원을 성사시키려는 문재인 정부의 노력이 한창인 시점에 무더기 미사일 도발로 찬물을 끼얹었다. 문 대통령에게 ‘오지랖’ 운운하는 막말을 퍼붓더니 “공허한 말치레와 생색내기… 시시껄렁한 물물거래”(이달 12일 선전매체 ‘메아리’) 같은 말로 대북지원을 폄훼하고 있다. 남북 정상회담 열기가 뜨겁던 지난해엔 청와대를 ‘미국의 삽살개’로 비방하고 입에 담기 어려운 극언을 서슴지 않는 내용의 동시집을 내놓은 사실도 드러났다. 앙상한 아이들의 모습을 내세워 지원을 호소하면서 뒤편으로는 동심 속에 동족을 악마화하는 증오를 심는 이중성은 용납되기 어렵다. 이러니 북한이 대북지원을 “서울의 ‘조공(tribute)’으로 여긴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물론 북한 당국의 태도야 어떻든, 대북지원 식량이 주민에게 온전히 돌아가건 말건 ‘쌀을 가능한 한 빨리 보내겠다’는 정부의 뜻은 확고해 보인다.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여파로 벽에 부닥친 남북관계를 인도지원이란 도약대로 뛰어넘겠다는 복안이다. ‘인도주의’란 모자를 쓴 식량 지원은 여론 반발을 피할 수 있는 아이템이다.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를 비판하면서도 식량 지원에는 변변한 대응논리를 세우지 못해온 야권은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다. 자유한국당 중진 의원은 “국민정서상 우리 당이 대북지원에 반대하는 순간 ‘반북, 반인도적 정당’이란 프레임에 갇혀버릴 수 있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청와대와 정부가 꼭 챙겨야 할 대목도 있다. 첫째, 김대중·노무현 정부 당시 북한에 차관 형태로 보낸 240만 톤의 쌀을 비롯한 3조5000억 원어치의 대북지원 처리문제다. 당시 고위 관료들의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상환을 여태껏 거부하고 있다. 천문학적인 혈세가 떼일 위기에 처했는데도 누구하나 책임지려 않는다. 이런 태도는 대북정책에 대한 지지 철회나 비판으로 이어졌고, ‘퍼주기’ 란 말은 무책임한 대북 유화책이나 지원의 대명사가 됐다.

둘째, 식량이나 대북물자 전용(轉用·빼돌리기)을 막을 대책 마련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보낸 쌀은 상당 물량이 군부대로 흘러갔고, 6000만 개(40㎏ 포장)에 이르는 쌀 포장용 마대는 전방 진지 구축용으로 쓰였다. 같은 시기 북송한 4만8000여 톤의 감귤은 노동당 간부와 평양 특권층의 선물용으로 쓰였다. 어려운 북한 주민에게 비타민 공급원이 될 것이란 바람은 퇴색했다. 국가정보원과 국방부 등 부처는 이런 정황을 파악하고도 정부 눈치를 보며 쉬쉬하다 2008년 보수 성향 정권으로 바뀐 뒤에야 앞다퉈 관련 사실을 언론에 브리핑했다.

셋째, 북한 당국이 우리 국민의 대북지원에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주민이 이를 공감토록 하는 일도 중요하다. 향후 남북관계에 대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핵심층의 진정성을 알 수 있는 바로미터란 점에서다. 아울러 지난해 8·15 상봉행사 이후 중단된 이산가족 해결을 위한 노력도 재개돼야 한다. 북한이 장기 억류 중인 김정욱 선교사를 비롯한 우리 국민 6명의 송환과 국군포로·납북자의 귀환도 북측에 촉구해야 한다. 이는 인도주의의 유무상통(有無相通)이다. 또 대북지원이 국민 성원 속에 지속될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퍼주기’ 논란에 다시 한번 갇혔다가는 정부의 대북접근 구상도 공염불이 될 수 있다. 대북지원은 선이고, 반대는 악이란 구도는 당장 먹힐지 모르지만 후유증이 만만치 않을 수 있다. 대북지원 신중론에도 정부가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남녘 동포의 온정이 북한 주민의 밥상에 따끈하게 전해지도록 할 지혜를 모으는데 머리를 맞대야 할 때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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