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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땅끝 가까운 ‘쑥섬’은 어떻게 ‘고양이섬’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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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고양이 모양 조형물. 김기범 기자 holjja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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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림으로 조금씩 알려지다

2017년 개방 후 유명해져

동물구조단체 등 활동가들

사료 보내고 프로젝트 제안

사람과 고양이가 행복하게

함께 살 곳 만들기 위해 노력

사람 덜 겁내고 풍경에 녹은

고양이 덕분에 관광객 몰려


전남 고흥군 쑥섬(애도)의 고양이들은 육지 길고양이들에 비해 사람을 덜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낯선 사람이 다가오면 피하거나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는 건 다를 바 없었지만, 조금만 다가가려 해도 금세 후다닥 도망가는 육지 길고양이들과 달랐다. 언제나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후천적으로 배워온 육지 길고양이들과 달리 사람이 별다른 해코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듯한 모습이었다.

지난 11일 기자가 찾은 쑥섬은 나로우주센터로 유명한 나로도 서쪽에 있는 섬이다. 쑥이 많아 ‘쑥섬’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이 섬은 17가구 20여명이 사는 작은 섬이다. 나로항에서 쑥섬 사이를 오가는 12인승 도선을 타면 2~3분 만에 도착할 수 있을 정도로 나로도에 바짝 붙어 있다. 서남해안에 흔히 있는 작은 섬으로 여기고 지나칠 법한 이 섬이 최근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이유는 사람을 덜 겁내는 고양이들에 있다. 일명 국내 최초의 ‘고양이섬’으로서 섬 주민들이 고양이들과 공존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섬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점점 더 많은 관광객들이 쑥섬을 찾고 있다.

이날 쑥섬 곳곳에서 마치 숨은그림찾기 속 그림처럼 풍경에 녹아들어 있는 고양이들을 볼 수 있었다. 사람이 사는 집 마당에 누워 편히 휴식을 취하거나 사람이 살지 않는 집 기와에 누워 낮잠을 즐기고, 관광객들 앞에 나타나 길잡이를 하는 듯 앞서가는 모습에 내륙에서는 보기 힘든 느긋함이 느껴졌다. 이날 함께 쑥섬을 방문한 동물보호단체 동물구조119 회원이 사진을 찍으려 하자 한 고양이는 마치 포즈라도 취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바다를 배경으로 고양이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과 고양이 사료를 챙겨주는 주민들, 사료 주변에 옹기종기 모인 고양이들의 모습은 한 폭의 평화로운 풍경화를 연상케 했다.

사실 길고양이가 사람이 다가오면 경기 들린 듯 깜짝 놀라 도망가는 장면은 한국 사람들에겐 익숙하나 외국에서는 보기 힘들다. 유럽이나 동남아, 일본 등에도 길고양이가 많지만 해를 끼치는 이들이 적다 보니 이들 나라의 길고양이들은 대체로 사람에 무심한 경우가 많다. 쑥섬 역시 그런 나라들과 비슷했다. 모든 주민이 고양이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해코지를 할 정도로 싫어하는 이들이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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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동물보호단체의 한 여성 회원이 스마트폰 카메라로 고양이를 촬영하고 있다.김기범 기자 holjja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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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섬이 고양이섬이라고 해서 고양이들만을 위한 섬이라거나 고양이가 바글바글해 어디를 가나 쉽게 고양이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고양이섬이라고 해서 고양이를 잔뜩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한 관광객이 고흥군청에 “고양이를 보지 못했다”며 불만 섞인 민원을 제기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쑥섬의 고양이는 약 20명인 주민 수의 2배가량인 40여마리로, 조용히 섬을 산책하다보면 우연히 마주치는 정도다. 관광객들이 기대하듯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쑥섬은 우연한 계기를 통해 고양이섬으로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지난해 7월 관광차 쑥섬을 방문했던 동물구조119 활동가 정소현씨는 이 섬에서 흔치 않은 광경을 목격했다. 다른 지방과 달리 주민들은 개를 키우지 않았고,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챙겨주기도 했다. 개뿐 아니라 소, 닭 등 다른 동물들도 없는데 고양이만 유독 사람 수보다 많은 것도 특이했다. 다만 주민들이 주는 잔반 등을 먹이로 삼는 탓에 고양이들 건강 상태는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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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한 쑥섬 주민이 자신의 집 마당에서 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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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는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철에는 먹이로 물고기를 줄 수 있다보니 고양이들 건강이 좋고, 물고기가 안 잡히는 시기에는 고양이들 건강이 안 좋아지는 현상이 매년 되풀이됐다는 주민들의 얘기를 듣고 사료를 보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고양이에게 사료를 주자 건강이 부쩍 좋아지는 것을 보면서 동물보호단체의 호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때마침 정씨가 ‘길고양이 친구들’ 커뮤니티에 올린 쑥섬 길고양이 사연을 보고 전국의 애묘인이나 동물보호단체 활동가들이 쑥섬으로 보내온 고양이 사료가 수t에 달했던 것도 주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때 동물구조119 임영기 대표가 주민들에게 고양이섬 프로젝트를 제안하면서 기존의 마을 가꾸기에 고양이와 공존하는 섬이라는 내용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고양이섬으로 알려지고 사료를 먹이면서부터 배설물 때문에 고양이들을 좋아하지 않던 주민들의 불만도 사그라들었다. 사료를 먹은 뒤로 고양이들이 설사를 하지 않게 되면서 섬이 더 깨끗해지고, 배설물을 치우기가 쉬워진 덕분이다. 쑥섬 주민들은 고양이들을 불쌍히 여겨 사람이 먹는 밥을 먹이로 줬는데 고양이들의 건강 상태는 좋지 않았다. 하지만 사료를 먹기 시작하면서 건강도 좋아지고, 소화도 잘돼 설사를 하지 않게 됐고 치우기 쉬운 형태로 배설하게 된 것이다. 20여년째 쑥섬에서 마을 가꾸기 활동을 벌이면서 쑥섬지기로 알려진 김상현 쑥섬마을가꾸기위원장은 “마을 주민들 중에는 고양이에게 주려고 밥을 식구 수보다 더 많이 하거나 먹던 밥을 내주는 이들도 있었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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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섬 곳곳에 설치된 고양이급식소에서 고양이들이 먹이 먹는 모습을 지켜본 임영기 대표는 “고양이들은 먹이가 풍부할 경우 약한 개체에게 먼저 먹이를 먹게 하고, 강한 개체들은 나중에 먹는 ‘배려’의 모습을 보인다”며 “쑥섬도 먹이가 풍부한 편이기 때문에 그런 모습이 나타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사람이 고양이를 배려하자 고양이들도 서로를 배려할 여유가 생겼다는 얘기다. 임 대표와 회원들은 이날 주민들에게 고양이급식소에서 사용할 나무 상자와 사료를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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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구조119에서 제공한 고양이급식소에서 먹이를 먹는 고양이와 순서를 기다리는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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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섬으로 알려지기 전 쑥섬은 원시림과 전라남도 제1호 민간정원으로 조금씩 알려지고 있던 곳이기도 하다. 쑥섬이 본격적으로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한 시기는 2017년이었다. 이전에는 외부인들의 출입을 제한했다. 마을 주민들은 당시 수차례 회의를 통해 마을 가꾸기와 마을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서는 외부인들에게 섬을 개방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쑥섬에 도착한 관광객들이 탐방코스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당숲. 약 400년간 사람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원시림으로 난대성 식물인 팽나무, 푸조나무, 후박나무 등이 어우러져 있다. 이 숲은 2017년 산림청, 사단법인 생명의숲, 유한킴벌리가 공동으로 주최한 ‘제17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누리상’에 선정되기도 했다. 당시 생명의숲은 마을 주민들이 스스로 숲을 아끼고 지켜왔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쑥섬에 개는 없고, 고양이만 남은 것은 당숲에서 지내던 당제와도 관련이 있다. 김상현 위원장은 “당제를 지낼 때 개나 닭이 울면 부정을 탄다는 믿음 때문에 개나 닭 등의 울음소리가 나면 당제를 처음부터 다시 지냈다고 한다”면서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개를 기르지 않게 됐다”고 설명했다. 탐방코스 정상의 별빛정원은 고채훈씨가 18년 전부터 마을을 살리기 위해 조성한 꽃밭이다. 바로 옆의 나로도는 물론, 멀리 거문도가 보이고 날씨가 좋은 날엔 제주도까지 보이는 절경을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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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현 쑥섬마을가꾸기위원장이 한 주민의 집 앞에서 동물구조119가 제공한 고양이급식소를 설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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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섬이 개방된 첫해인 2017년에는 관광객 수가 2000여명에 머물렀지만 입소문을 타면서 2018년에는 7월까지 약 1만5000명을 기록할 정도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원래 이 섬을 거쳐 인근 사양도까지 가던 사양호가 사양도까지 다리가 연결되는 바람에 폐선되면서 쑥섬 관광은 위기를 맞기도 했다. 다행히 지난 1월10일부터 작은 도선이 운항하면서 다시 관광객 수가 빠르게 늘고 있다. 올 들어 지난 4월 말까지 쑥섬을 찾은 방문객 수는 4511명에 달한다.

주민 합의를 통해 고양이섬을 테마로 한 마을 가꾸기를 추진 중인 주민들이 가장 경계하고, 질색하는 얘기는 고양이섬 만들기가 성공할 것인가, 실패할 것인가라는 식의 질문이다. 김상현 위원장은 “쑥섬 가꾸기는 긴 시간 동안 꾸준히 이어나갈 활동이고, 짧은 기간에 성공과 실패를 논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지속 가능한 마을을 위해 쑥섬이 지향하는 것은 고양이들만의 천국이 아닌 사람과 고양이가 공존하는 섬이라고 강조했다.

임영기 대표는 “주민들 의견을 존중하면서 사람과 고양이가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마을을 만들도록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김기범 기자 holjja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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