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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장석주의 사물극장] [9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와 '나비 표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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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1899 ~1977)는 우리 존재를 '영원한 암흑 속에서 일어난 짧은 전기 누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 짧은 생애 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비참과 고통을 겪는가. 유년기의 달콤한 행복이나 자연의 아름다움은 그 비참과 고통에 대한 보상인 것.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귀족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엄청난 유산을 상속받지만 세계 이곳저곳을 유랑하는 디아스포라가 그의 운명이었다.

나보코프 일가는 볼셰비키혁명의 소용돌이를 피해 1919년 독일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베를린에서 한 극우파에 의해 암살당했다. 나보코프는 1940년 나치를 피해 다시 미국으로 망명해 뉴욕에 정착했다. 스탠퍼드, 코넬, 하버드대학교 등에서 문학 강의를 하는 한편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소설을 썼다. 1955년에 나온 '롤리타'가 큰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그의 생애는 고단했다. '롤리타'는 지금은 고전으로 평가를 받지만 출판 초기에는 소아성애자의 뒤틀린 욕망을 다뤘다는 이유로 '청소년 유해 도서'로 분류되어 금서로 지정되는 소동을 겪었다.

나보코프는 어려서부터 나비 채집에 열을 올렸다. "문학보다 나비에서 더 행복한 열정, 엄청난 희열을 느꼈다"고 말할 정도였다. '남아메리카의 가장 외진 지역에 서식하는 다양한 나비 무리'를 가리키는 '블루' 연구에서 큰 업적을 남긴 그는 나비 표본을 바라볼 때 가장 행복했다. 1942년에서 1948년까지 하버드대학 비교동물학 박물관에서 곤충학 특별연구원으로 근무했다.

나보코프는 유복한 어린 시절이나 나비같이 아름다운 것에의 매혹에서 덧없음을 느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으니까. 그럼에도 그는 평생 나비를 쫓아 열대우림 등지를 헤매 다녔다. 나비는 그에게 잃어버린 어머니, 모국, 아름다움에 대한 덧없는 환영 같은 게 아니었을까.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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