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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장제원 부친이 ‘날치기’ 사회…선거제 흑역사 총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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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용 선임기자의 정치 막전막후 264/ 국회의원 선거제도 변천사

독재와 쿠데타 세력이 국회의원 선거제도 마음대로 만들어

국가재건최고회의·비상국무회의·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제정

1988년 이후엔 1·2당 담합으로 ‘승자독식 선거법’ 안 고쳐

대표성·비례성 높이는 ‘대의명분’과 ‘국민 다수여론’ 따라야

패스트 트랙은 집권세력 공약 이행 법안 통과 유일한 통로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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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선거법 개정안을 신속처리대상 안건으로 지정한 것에 대해 반대론자들은 “게임의 룰인 선거법을 일방적으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입에 달고 삽니다.

‘그래야 한다’는 의미의 당위론으로는 맞는 말입니다. 게임의 룰은 선수가 아니라 게임 협회나 심판이 정해야 합니다. 선수가 정해야 하는 경우라면 게임에 참여하는 모든 선수가 합의해서 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다’라는 의미의 현실론으로는 틀린 말입니다. 우리나라 선거법은 공정하게 만들어진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주로 독재 정권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선거법을 일방적으로 만들었습니다.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법의 ‘흑역사’를 한 번쯤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지금 벌어지고 있는 선거법 논란의 배경을 정확히 이해하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전망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는 1948년 5월 10일 미군정 당국의 군정법령에 의해 실시됐습니다. 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국민의 대표를 뽑은 것입니다. 임기 2년의 국회의원 200명을 소선거구제로 선출했습니다. 선거인 명부는 선거인의 자진등록에 의하여 작성하는 자진신고 등록제였으며, 21세 이상 국민에게 투표권이 주어졌습니다.

2대 국회의원 선거는 1950년 5월 10일 치러졌습니다. 제헌 국회가 제정한 국회의원 선거법에 따라 210명을 소선거구제로 뽑았습니다. 헌법이 국회의원 임기를 4년으로 정했기 때문에, 2대 국회부터 임기는 4년으로 늘어났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이른바 ‘발췌 개헌’을 했습니다. 개정 헌법은 민의원과 참의원을 각각 선출하는 양원제를 도입했습니다. 그러나 1954년과 1958년 국회의원 선거는 전쟁 이후 혼란, 준비 부족 등을 이유로 민의원 선거만 치렀습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헌법이 내각책임제로 개정되고 새로운 국회의원 선거법에 따라 1960년 7월 처음으로 양원제 선거가 실시됐습니다. 233명의 민의원, 58명의 참의원을 선출했습니다.

하지만 1961년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군인들은 국회를 해산시키고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최고 권력기관을 설치했습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2년 12월 3공화국 헌법을 만들어 국민투표로 확정했습니다. 권력구조는 대통령제로, 국회는 단원제로 환원시켰습니다. 국회의원 수는 150명 이상 200명 이하로 묶었습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3년 1월 국회의원 선거법을 제정했습니다. 처음으로 비례대표제를 도입했습니다. 당시 국회의원 선거법 제안 이유는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이유를 “지연·혈연의 폐를 방지하기 위하여 소선거구에 다수대표제와 전국선거구에 비례대표제를 병용”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에 따라 1963년 11월 치러진 6대 국회의원 선거는 지역구 131명, 전국구 44명으로 모두 175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1972년 10월 유신으로 국회를 해산하고 비상국무회의가 국회의 권한을 대신하도록 했습니다. 비상국무회의가 유신헌법을 만들었습니다. 임기 6년의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간접선거로 선출하도록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종신 집권이 가능하도록 한 것입니다. 국회의 3분의 1은 대통령이 일괄 추천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는 유신정우회 의원으로 구성하도록 했습니다.

비상국무회의는 국회의원 선거법을 만들었습니다. 지역구 선거는 하나의 지역구에서 2명씩 뽑는 중선거구제를 처음으로 도입했습니다. 이에 따라 1973년 2월 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46명의 지역구 의원(임기 6년)과 73명의 유신정우회 의원(임기 3년)이 선출됐습니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쿠데타로 집권했습니다. 신군부는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활동을 금지했습니다. 국회의 기능을 대신하는 국가보위입법회의를 설치했습니다. 전두환 신군부는 1980년 10월 개헌을 했습니다. 7년 단임 대통령을 선거인단이 간접선거로 선출하도록 했습니다.

1981년 1월 국가보위입법회의는 중선거구제와 전국구 제도를 병행하는 국회의원 선거법을 만들었습니다. 이 선거법에 따라 1981년 3월 11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하나의 선거구에서 두 명씩 뽑는 중선거구제로 지역구 의원 184명을 선출했습니다. 전국구 의원은 92명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나라 국회의원 선거법은 이처럼 쿠데타 세력이 헌정 질서를 무너뜨리고 헌법을 새로 만든 뒤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일방적으로 제정한 참담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게임의 룰인 선거제도는 여야의 합의에 따라서 만들어야 한다’는 자유한국당과 이른바 보수 언론의 주장은 당위론으로만 존재할 뿐 실제 우리나라 정치 현실에서는 거의 존재한 적이 없다는 얘깁니다.

우리나라 헌정사에서 국회의원 선거제도에 대해 여야 합의가 이뤄진 것은 1987년 6월항쟁 이후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6공화국 헌법이 만들어지고 1987년 12월 직선제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됐습니다. 1988년 4월 26일 13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1노 3김’(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은 국회의원 선거법을 둘러싼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여러 사람의 회고록과 자서전을 찾아보았습니다. 특히 중선거구제였던 국회의원 선거제도가 소선거구제로 갑자기 바뀐 배경이 궁금했습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이 부분을 정확히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회고록을 보면 “13대 국회의원 선거는 개정 법률에 의해 소선거구제로 실시하게 되었다”고 딱 한 줄이 나옵니다. 민정당 참패로 이어진 소선거구제를 자신이 도입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시 민정당 국회의원이었던 이종찬 전 국정원장이 당시 사정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부분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한겨레

“그런데 노태우 당선자 측근 정략가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의 생각은 명료했다.”

“선거법을 개정해 지금의 1구 2인제를 1구 1인제로 개정하면 더 많은 사람을 공천할 수 있게 될 것이고, 그 기회에 노태우와 가까운 세력을 당내에 포진시킬 수 있다는 계산도 작용했다.”

“사실 1인 2구제 선거법은 박정희 시대의 작품이다. 그 당시 유혁인 정무수석은 원내 안정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지역 선거는 여야가 나누어 먹고, 대통령이 지명하는 유정회를 통해 원내 다수 세력을 확보한다는 발상에서 이런 방법을 고안했다. 박 대통령은 당시 1구 2인제로 한 지역에서 여야가 윈윈한다는 점을 들어 ‘이 선거법은 여야 모두 영구히 고치려 하지 않을 것’이라며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고 한다.

하지만 유신 시대가 끝나면서 그 유물인 유정회는 없어지고, 그 대안으로 비례대표제가 도입되었다. 그런 마당에 1구 2인제를 꼭 과거의 시각으로 볼 필요가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의원총회의 논쟁이 가열되는 가운데 소선거구제 반대론자로 나섰다.”

“나는 열렬히 주장했다. 그러나 청와대의 지시를 받은 소선거구 주창자들은 ‘1구 2인제란 유신 잔재’라는 주장을 내세워 내 의견에 무조건 반대했다. 그 후 채문식 당 대표와 심명보 사무총장 등은 중앙집행위원 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선거구제를 청와대 지시대로 밀어붙였다.”

“이때 야당의 입장은 어떠했는가? 김대중의 평민당은 1구 1인제를 주장했고, 김영삼의 민주당은 그에 반대했다. 그리고 김종필의 공화당에서는 대선거구제를 주장했다.”

“이런 논란 끝에 민정당 이대순 총무 등 4당 총무가 어렵게 합의해 내놓은 방안은 1구 1~3인제였다. 농촌에서는 1인, 그리고 대도시에서는 2~3인으로 한다는 타협안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김영삼의 마음이 바뀌었다. 그는 대뜸 ‘민주주의에 적합한 법은 1구 1인제 선거법’이라고 말하면서 이에 즉각 호응하라고 민주당에 지시했다.”

“소선거구제가 탄력을 받았다. 노태우 대통령도 잘되었다 싶어 소선거구제로 마음을 완전히 굳혔다.”

“하여간 1구 1인의 소선거구제 선거법은 일단 국회에서 무리하게 통과되었다. 바로 이 선거법이 그 뒤 우리 정치사를 꼬일 대로 꼬이게 만든 원흉이다. 지역 독점주의를 통해 경상도나 전라도에서는 특정 정당에 관한 한 ‘정당 공천=당선’이라는 큰 병폐를 낳았고, 나아가 역사에 씻을 수 없는 과오가 되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소선거구제 수용을 야권통합을 위한 자신의 결단으로 회고했습니다. 김영삼 회고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988년 2월 8일 오전 9시, 나는 전격적으로 총재직 사퇴를 선언했다. 야권통합을 위한 또 한 번의 결단이었다. 불과 한 달 전에 전당대회가 안겨 준 재신임을 다시 내놓으면서 나는 야권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2월 21일 민주당이 야권통합 협상 기구 대표들이 나를 찾아와 지원을 요청했다. 이때 나는 나의 총재직 사퇴에도 불구하고 통합 협상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을 보고, 통합의 진전을 위해 23일 오전 마포 가든호텔에서 김대중을 만나 그의 주장인 소선거구제를 수용해 주었다.”

“당시 나의 소선거구제 수용은 완전히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또다시 총재직 사퇴 대신 통합야당의 양 김 공동대표제를 요구, 통합 협상은 금방 벽에 부딪혔다. 김대중은 자신의 주장에 나를 끌어들여 총재직에 연연한다는 비판을 나와 나누어 가지려 했다. 나는 평민당과의 통합 협상을 포기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기록은 다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신이 왜 소선거구제를 주장했고 소선거구제가 어떻게 도입됐는지 자서전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 또한 야권통합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통합을 위해 민정당과 민주당이 추진하고 있는 중선거구제의 철회를 요구했다. 야권통합의 의미는 원내 제1당이 되는 데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중선거구제로는 어림도 없었다. 소선거구제로 정면 승부를 펼쳐야 가능했다.

나는 본래부터 소선거구제를 지지했다. 민주주의가 정착된 선진국들은 거의가 소선거구제를 채택했다. 양당제를 정착시키는 데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고, 당시 여론조사를 하면 국민들이 압도적으로 소선거구제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는 민주당에 중선거구제를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김영삼 씨가 조종하는 민주당은 이를 거부했다.”

“김영삼 씨는 여당에 승리하는 것보다 평민당을 해체하는 데 몰두했다. 민정당까지 야당이 합의하면 선거법 개정안을 받아주겠다고 했지만, 민주당은 유신 시대의 유물인 중선거구제에 집착했다.”

“민주당은 여전히 중선거구제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낙선이 두려워 동반 당선을 바라는 상당수의 후보자를 제어하지 못했다. 이러자 보다 못한 민정당이 국민의 뜻이라며 소선거구제를 들고 나왔다. 민심을 판독하고 민의를 선점하려는 포석이었다. 3월 8일 소선거구제를 골격으로 한 국회의원 선거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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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전 총재는 1988년 당시 국회의원 선거제도에 대해 자신이 어떤 주장을 했는지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대신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뒤 자신의 제의로 3김 회동이 이뤄진 얘기, 여소야대 정국에서 자신이 이끄는 신민주공화당이 캐스팅 보트를 행사하며 정국을 주도했다는 얘기를 길게 써 놓았습니다.

아무튼 1988년 4월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국회의원 선거제도가 소선거구제로 바뀐 배경에는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세 사람의 정치적 합의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최근 국회에서 선거법 패스트 트랙을 둘러싸고 여야가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1988년 3월 8일 당시 민정당 단독으로 국회 본회의에서 국회의원 선거법을 강행 처리했다는 기사가 화제에 올랐습니다. 특히 본회의장에서 사회를 봤던 사람이 바로 장제원 자유한국당 의원의 부친 장성만 국회 부의장이었다는 사실이 함께 알려지면서 장제원 의원에게 많은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당시 민정당에 의한 강행처리가 가능했던 것은 1985년 12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여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선거제도 덕분에 민정당이 국회에서 과반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승민 의원의 부친 유수호 전 의원이 선거법 강행처리에 가담했다는 식의 보도가 있었지만, 잘못된 것입니다. 유수호 전 의원은 선거법 강행처리 이후인 1988년 4월 26일 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됐습니다.

그런데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세 사람이 소선거구제에 합의했는데도 불구하고 민정당이 국회의원 선거법을 날치기했던 이유가 뭘까요? 선거운동 방법과 비례대표 배분 방식 등에서 여야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988년 3월 8일 새벽 국회의원 선거법 날치기 처리가 이뤄진 뒤, 같은 날 오후에 속개된 국회 본회의에서 당시 박관용 통일민주당 의원이 이런 내용의 의사진행 발언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공명선거를 해야겠다고 하는 의지만 조금이라도 있었다고 하면 이 선거법은 얼마든지 타협의 여지가 있었습니다. 이미 민정당, 민주당, 평민당은 소선거구제를 합의하고 다 같이 소선거구제를 제안했습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국민의 주권이 바로 행사될 수 있도록 공명선거를 보장하자는 제도적 개선이었습니다.”

“국회의장은 오늘 이 자리에서 아침에 있었던 이 불행한 사태를 말끔히 씻고 새롭게 대화를 통한 합법적인 절차에 의한 국회의원 선거법을 만들도록 조치해 주어야 되는 것과 동시에 국회의장은 오늘의 이 사태에 대해서 국민 앞에 정중한 사과를 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박관용 의원의 제안은 무시됐습니다. 정국은 곧장 국회의원 선거 국면으로 바뀌었습니다.

1988년 하나의 선거구에서 한 명의 국회의원을 뽑는 소선거구제가 도입된 이후 지금까지 큰 틀에서 국회의원 선거법이 바뀐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2004년 1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비례대표 선출을 위해 정당 투표를 따로 하는 ‘1인2표제’를 도입한 것이 유일한 변화입니다. 기존 선거제도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거법을 고친 것입니다.

그동안 소선거구제를 중대선거구제, 도농복합선거구제, 독일식 연동형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등으로 바꾸자는 요구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선거법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소선거구제 국회의원 선거제도가 1당과 2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1988년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제1당과 제2당은 매번 득표율보다 훨씬 많은 의석을 차지했습니다. 제3당, 제4당은 매번 득표율보다 훨씬 적은 의석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선거구제가 갖는 승자독식 원리와 지역갈등 구조 때문입니다.

자연스럽게 1당과 2당의 묵시적 담합이 이루어졌습니다. 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보수 정당과, 평민당-민주당-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대통합민주신당-통합민주당-민주통합당-새정치민주연합-더불어민주당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중도개혁 정당 양쪽이 모두 현행 소선거구제 선거법으로 이득을 보는 기득권 세력입니다.

결국 “게임의 규칙인 선거법만큼은 여야 합의로 개정했다”는 자유한국당과 이른바 보수 언론의 주장은 거짓입니다. 1987년 민주화 이전에는 쿠데타 세력이 국회의원 선거법을 마음대로 만들었고, 1987년 민주화 이후에는 선거법 개정 자체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 진실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자유한국당을 제외하고 선거법을 개정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거법은 여야 합의에 따라 개정하는 것이 옳겠지요.

하지만 모든 정당의 이해관계를 다 따져서 아무도 손해 보지 않도록 선거법을 개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의 가장 기본적 가치인 대표성과 비례성을 높이면서 정치의 본령인 대화와 타협을 활성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대의명분’, 그리고 주권자인 ‘다수 국민의 뜻’에 따라 선거법을 개정해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민주당과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이 패스트 트랙에 올린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현재로써는 ‘대의명분’과 ‘다수 국민의 뜻’에 상대적으로 가장 가까운 선거제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측면도 고려해야 합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우리 국민은 계층과 지역의 이해를 다양하게 대변할 수 있는 다당제 구조를 선호하고 있습니다. 국회의원 선거 결과 거의 매번 제3당, 제4당이 출현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제 권력구조가 다당제를 여당과 야당, 양당제로 자꾸 환원시키는 현상이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대통령 선거로 내세운 공약을 이해하고 국정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국회에서 과반의석을 확보해 법안을 통과시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1987년 이후 합당, 의원 영입, 연립정부 등 정계개편과, 국회에서 법안 강행처리가 일상화됐던 배경입니다.

그러나 2012년 국회선진화법 도입으로 법안 강행 처리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선진화법이 정한 신속처리대상 안건(패스트 트랙) 지정은 집권세력이 소수 야당의 맹목적 반대를 누르고 법안을 처리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로 기능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패스트 트랙 사태의 정치적 함의를 읽으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관찰 포인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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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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