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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6 (목)

판문점선언 1년, 우리만의 '반쪽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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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오늘 지상파 생중계 등 준비

北, 어제까지 참석 여부 통보 안해

26일 오후 3시 30분쯤 천해성 통일부 차관이 정부 서울청사로 들어섰다. 이날 오전 7시 30분쯤 개성 남북 공동 연락사무소를 향해 출발한 지 약 8시간 만이었다. 우리 측 연락사무소장을 겸하는 천 차관은 매주 금요일마다 개성으로 출근한다. 북측과의 '소장 회의'를 위해서다.

그러나 이날 북측 전종수 소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9주 연속 소장 회의 불발이다. 이 기간에 천 차관은 금요일마다(남북 공휴일 제외·총 6차례) 개성을 찾았지만 전종수는 한 번도 개성에 오지 않았다. 앞서 북한은 '하노이 회담 결렬'의 여파가 이어지던 지난달 22일 연락사무소 근무자들을 일방적으로 철수시키기도 했다.

연락사무소의 이 같은 파행 운영은 1년 전 남북 정상이 합의한 '4·27 판문점 선언'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연락사무소 설치'는 판문점 선언 1조 3항에 담겼다. 1조 1항과 2항이 각각 '기채택된 남북 선언 이행' '빠른 시일 내 고위급 회담 개최' 등 원론적 문구임을 감안하면 연락사무소는 판문점 선언에서 가장 중요하고 실질적인 내용이다. 이것을 북한의 철저한 무시 속에 우리만 '일방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나머지 합의 내용들도 마찬가지다.

통일부는 27일 판문점에서 '평화 퍼포먼스'를 계획하는 등 '4·27 1주년'에 큰 의미를 두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26일까지도 참석 여부를 알리지 않아 사실상 '반쪽짜리' 행사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통일부는 평화 퍼포먼스를 하루 앞둔 26일엔 취재진을 불러 '미디어 데이' 행사를 열었다. 행사 공지(21일), 프로그램 공지(24일)를 포함해 세 차례에 걸쳐 대대적으로 홍보에 나선 것이다. 주말 황금시간대인 27일 오후 7시부터 시작되는 본행사는 지상파 방송 3사를 통해 생중계된다. 일각에선 "판문점 선언은 '공동 합의'라 의미가 큰 건데, 우리만 기념하는 게 무슨 소용이나"는 비판도 나온다.

이날 행사에 참가한 김연철 통일부 장관은 "(4·27 1주년 행사를) 남북이 함께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있다"면서도 "우리가 이러한 행사를 통해서 판문점 선언의 이행 의지를 다시 한번 확실하게 한다는 의미도 적지 않다"고 했다. 탁현민 대통령 행사기획 자문위원은 "누가 봐도 남북이 같이하면 좋다"고 했다. 그는 '반쪽짜리' 행사라는 비판에 "판문점에서 처음으로 미국·중국·일본 아티스트들이 한반도 평화를 기원해주기 위해 멀리서 왔는데 스스로 반쪽짜리 행사라고 그렇게 해야 할 문제인가 싶다"고 반박했다.

국방부 역시 판문점 선언 1주년을 맞아 지난 25일부터 전쟁기념관에서 '9·19 남북 군사 분야 합의'와 관련된 기록과 사진·영상 등을 전시하고 있다. '9·19 군사 분야 합의서'의 정식 명칭이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 분야 합의서'라는 점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유엔군사령부는 또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남측 지역에서만 일반 관광객 견학을 재개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9·19 군사 분야 합의의 주요 내용 중 하나인 '남북 민간인 JSA 자유 왕래'를 우리만이라도 이행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측은 '유엔사는 논의에서 빠지라'고 요구하며 군사 분야 합의서를 이행하지 않고 있다.

북한은 우리 정부와 달리 '판문점 선언 1주년' 기념에 소극적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판문점 선언 1주년을 기념하는 대신 러시아를 방문했다. 러시아 언론과의 인터뷰,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판문점 선언'과 관련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북한은 우리 측에 '판문점 선언'의 이행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메시지만 쏟아내고 있다. 북한 선전 매체 '우리민족끼리'는 이날 "오늘 남조선 당국이 무엇보다 신경을 써야 할 것은 북남 선언들의 충실한 이행"이라며 "오늘의 시대 흐름을 정확히 읽고 좌고우면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정작 북한은 핵물질 생산 등 핵무력 증강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완전한 비핵화'를 약속한 판문점 선언과 미·북 싱가포르 합의에 모두 반하는 행위지만 우리 정부는 아무런 문제 제기도 하지 않고 있다.

'판문점 선언' 성사의 주역들도 상당수 2선 후퇴한 상태다. 평창올림픽 방남(訪南)을 시작으로 남북 정상회담 준비를 총괄한 김영철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은 최근 하노이 회담 결렬의 책임을 지고 경질됐다. 평창올림픽 당시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과 함께 방남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도 최근 은퇴했다. 김영철의 오른팔로 남북 고위급 회담의 북측 대표 단장을 맡아온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장 역시 입지가 불안해졌다는 관측이 나온다.

북한의 대남(對南) 라인 변화가 가속화되며 남북 대화 공백기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4·27 당시 문재인 대통령을 수행했던 우리 측 인사 중 임종석 당시 비서실장은 청와대를 떠났고, 송영무 당시 국방부 장관과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교체됐다.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정의용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국정원장에게 책임을 묻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윤형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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