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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고 김용균 어머니 섰던 자리, 또 다른 청년 누나가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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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현장 추락사 24세 김태규씨 유족이 국회에 선 이유

경향신문

지난 10일 경기 수원의 한 건설현장에서 추락해 숨진 노동자 김태규씨의 누나 김도현씨가 25일 국회 정론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해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왼쪽 사진은 노동자 김태규씨가 탔다가 추락해 숨진 건설현장의 화물용 승강기. 유족들은 25일 경찰 수사가 끝나기도 전에 사고 현장이 훼손됐다고 주장했다. 김영민 기자·유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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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의 발엔 안전화 대신 운동화…현장 굴러다니는 헬멧 쓰고 작업”

지난 10일 경기 수원시의 한 아파트형 공장 신축 건설현장에서 20대 일용직 노동자가 작업 중 5층 높이에 있던 화물용 승강기에서 추락해 숨졌다. 용역업체 소속인 김태규씨(24)가 이 건설현장에서 일한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그는 안전화 대신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김씨가 즐겨 신던 나이키 운동화였다. 시공사는 일용직에겐 안전화를 지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삼남매 중 막내인 김씨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유족은 이해할 수 없었다. 사고 당시 상황을 목격했다는 이들의 진술이 엇갈렸고, 사건 직후 “실족사인 것 같다”는 경찰의 말도 믿기 어려웠다.

25일 만난 김씨의 누나 김도현씨(28) 손엔 노트 한 권이 들려 있었다. 동생의 사고 이후 현장과 경찰서를 오가며 들은 사고 당시 상황, 목격자 진술 등이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김도현씨는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면서 “사고 후 보름이 지나도록 시공사인 건설사 관계자로부터 사건에 대한 어떤 설명이나 사과도 들을 수 없었다”고 했다.

“평소에도 열린 채 운행한 승강기, 문만 제대로 닫혔더라면…”

“평소 조심성이 많은 아이였어요. 사고 뒤 용역업체 사장도 태규가 빠릿하고 꼼꼼하게 일을 잘했다고 했습니다. 그날 대체 엘리베이터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렇게 허망하고 억울하게 죽어야 했는지….”

힘겹게 부검을 결정하고, 정신없이 장례를 치렀다. 조심성 많던 동생이 어쩌다 대형 승강기의 벽면 낭떠러지에서 추락했는지, 왜 안전장비 없이 맨몸으로 일해야 했는지는 여전히 의문투성이였다. 사건 발생 닷새 만에 사고 승강기 위치가 바뀌어 있는 등 현장이 훼손된 모습을 보고 가족들은 직접 진상을 밝혀야겠다고 결심했다. 노트는 장례 후 슬퍼할 겨를도 없이 현장을 오갔던 모녀가 밤새 작성한 기록이다.

김도현씨는 이날 동생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밝혀달라며 국회를 찾았다. 꼭 4개월 전 태안화력발전소 하청노동자 고 김용균씨(당시 24세)의 어머니 김미숙씨가 ‘제2, 제3의 용균이는 나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외쳤던 그 자리에, 또다시 20대 산재 사망자의 유족이 섰다.

■ 안전장비 없이…위험 내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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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씨의 죽음은 같은 나이에 석탄운반용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목숨을 잃은 김용균씨의 죽음과도 닮아 있다. 김태규씨는 화물용 승강기를 이용해 고층에서 건설 폐기물을 옮겨 나르는 일을 했다. 그러나 김씨 같은 일용직 노동자들에게는 안전모나 안전화, 안전벨트 같은 장비가 지급되지 않았다. 시공사 관계자는 유족에게 “하루만 오는 일용직이 많아 안전화를 지급하지 않았다”고 했다. 동료들은 김씨가 현장에 굴러다니는 헬멧을 쓰고 운동화를 신은 채 일했다고 증언했다. 김용균씨 사고와 마찬가지로, 위험작업을 시키면서도 안전교육은 실시하지 않았다. 안전교육 확인서에는 교육을 받았다는 서명을 했지만, 실제 교육은 이뤄지지 않았다고 동료들은 전했다.

경찰 조사 결과 김씨가 5층 높이에서 추락할 당시 화물용 승강기의 문이 열린 채 운행됐던 것으로 확인됐다. 문이 제대로 닫혀 있었더라면 발생하지 않았을 사고인 셈이다. 경찰은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현장소장 등 2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2017년 기준으로 한국의 산재 사망자 가운데 가장 많은 366명이 김씨처럼 추락해 숨졌다.

이 승강기는 사용 승인을 받지 않은 채로 불법 운행됐다. 관련법상 화물용 승강기에는 사람이 1명만 탑승해야 하지만 규정은 지켜지지 않았다. 김도현씨는 “동생은 사고 전에도 승강기 안에서 쉬자는 동료의 얘기에 위험하니 나가자고 할 만큼 현장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다. 그런 동생이 어쩌다 그 낭떠러지로 추락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 반복되는 ‘일터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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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고용노동부 통계를 보면 지난해 산재 사망자 중 40%는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김태규씨는 이 중에서도 가장 열악하다고 할 수 있는 용역업체 일용직으로 일했다. 김용균씨 사망사고를 계기로 ‘위험의 외주화’를 중단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면서 원청 사용자의 책임을 강화하는 내용으로 산업안전보건법이 28년 만에 전면 개정됐다. 하지만 정작 김용균씨가 일했던 발전소, 구의역 김모군이 일했던 지하철, 철도 등은 이 법의 도급 금지 대상에서 빠졌다. 최근 노동부가 입법예고한 하위법령 역시 미비해 노동계는 “김용균 없는 김용균법”이라고 비판한다.

지난 2월 폭발사고로 청년 노동자 3명이 숨진 한화 대전공장에서는 지난해 5월에도 비슷한 폭발사고로 5명이 목숨을 잃었다. 김용균씨 사고 두 달여 뒤 충남 당진 현대제철에서도 50대 하청노동자가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공장에서는 지난 12년간 총 35명이 작업 도중 숨졌고 이 중 29명은 비정규직이었다.

노동부의 특별근로감독, 시정명령에도 엇비슷한 사고가 매년 반복되는 이유는 처벌 자체가 미미하기 때문이다. 2008년부터 10년간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사건 4만여건 중 구속 기소된 경우는 단 9건이다. 같은 기간 일반 사건의 구속 기소율(1.6%)의 80분의 1 수준이다. 2016년 기준 산재 사망사고와 관련해 법원이 사업주에게 내린 평균 벌금액도 432만원에 불과하다.

산재 사망자 유가족은 반복되는 죽음을 막으려면 원청 기업 총수 등 경영 총책임자에게 산재 발생 책임을 묻고 처벌할 수 있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김미숙씨는 24일 열린 ‘2019 최악의 살인기업 선정식’에서 “한국은 노동자가 죽어도 원청이 벌금 400만원만 내면 넘어가는 나라”라며 “살인기업처벌법을 만들어 일하다 죽는 노동자가 더 이상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도현씨는 동생의 죽음 이후 사고 현장을 다시 찾았다가 현장이 훼손된 것을 봤다. 그는 슬퍼할 시간도 없이 진상규명을 위해 뛰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아들과 딸, 누군가의 동생이 또 이렇게 죽고 진실이 감춰질 것을 생각하면 태규 죽음의 진상규명은 우리 가족만의 일이 아니라고 확신한다”며 “계속되는 청년 노동자들의 죽음을 멈춰야 한다”고 말했다.

“개인 불운 아닌 기업 살인…산재를 보는 눈 바꿔야 사고 줄어”

이상윤 노동건강연대 대표

경향신문

“매년 산업재해 발생 추이를 보면 일정한 흐름이 나와요. 건설경기가 좋으면 건설업에서 그만큼 사망자가 늘고, 침체되면 사망자가 줄어듭니다. 이게 한국의 슬픈 현실입니다.” 이상윤 노동건강연대 대표(직업환경의학 전문의·사진)는 한국의 산업재해 사망은 사고라기보다는 ‘살인’에 가깝다고 말한다. 그는 해마다 2000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일하다 죽고, 비슷한 사고가 매년 반복되는 이유는 노동자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죽음을 막으려 애쓰지 않는 기업의 ‘구조적 살인’이라고 했다.

이 대표가 몸담은 노동건강연대는 14년째 산재사망이 많이 발생한 기업을 ‘최악의 살인기업’으로 선정·발표해왔다. 24일 이 대표를 만나 ‘김용균’ 이전과 이후로도 여전한 산재의 원인과 대책을 들었다.

사망자 대부분 하청 노동자

추락 등 ‘재래형 재해’ 반복

원청에 형사적 책임 묻는

‘기업처벌법’ 속히 제정돼야


- 한국 산재 사망 사고의 특징은 무엇인가.

“추락·협착·전도와 같은 ‘재래형 사고’가 여전히 산재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쉽게 말해 떨어져 죽고, 끼여 죽고, 넘어져 죽는다. 이는 적은 비용으로 손쉽게 예방할 수 있는 사고 유형이다. 바꿔 말하면 한국 사회가 산재 예방에 그 정도의 노력과 관심도 없다는 얘기다. 또 하나는 반복적이다. 떨어진 데서 또 떨어지고, 끼인 데서 또 끼여 죽거나 다친다. 사고가 발생해도 달라지는 게 별로 없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대기업에서도 산재가 빈발한다. 대기업에서 발생한 산재가 모두 ‘대기업 노동자’가 죽거나 다친다는 얘기는 아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50인 미만 소규모 사업장의 산재 사망이 많은데, 이런 소규모 하청·협력업체들이 대기업이 발주한 업무를 하거나 대기업 사업장에서 일하다가 산재가 발생한다. 지난해 포스코건설에서 노동자 10명이 죽었는데, 모두 하청업체 소속이었다. 이런 세 가지 특성을 고려하면, 한국의 산재 사망은 사고라기보다는 ‘살인’에 가깝다.”

- 그래도 ‘살인’이라 할 수 있나.

“누군가가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조치를 취하지 않아 다른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면서도 그 조치를 취하지 않아 사람이 죽으면 부작위에 의한 살인,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한다.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씨가 아들의 죽음이 ‘사고’가 아니라 ‘살인’이라고 말했는데, 마찬가지 맥락이다. 한국의 산재 사망 대부분이 이런 상황에 해당되지만 기업들은 이제껏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다. 산재에 접근하는 관점, 프레임을 바꿔야 반복되는 사고도 막을 수 있다.”

- 어떻게 바꿔야 하나.

“과거부터 한국 사회는 산재를 노동자 개인의 ‘불운’으로 여기거나, 재해자 개인의 과실이라며 책임을 전가하거나, 기업 경제활동의 ‘부수적 피해’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 ‘안타깝지만 회사 경영과 기업 경쟁력을 위해선 그 정도 피해는 어쩔 수 없다’ ‘피해 노동자에겐 경제적으로 보상해 주면 된다’는 식으로 접근했다. 기업 입장에서는 안전시스템을 바꾸기보다 개인에게 보상하는 쪽이 훨씬 싸고 손쉬운 해결 방식이다. 개인 간 합의로 끝나면 원인이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다. 그래서 같은 사업장, 심지어 사람이 죽어나간 자리에서 또 죽는다. ‘사고’와 ‘살인’은 문제의 접근법부터 다르다. 그래서 과격하게 보인다는 지적을 감수하더라도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운동 초기에 ‘기업살인법’이라는 표현을 썼다.”

- 산재 피해자 유족들도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요구한다. 기존 법으로는 한계가 있나.

“산재 발생 기업이 법원에서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더라도 벌금형에 그치는 등 처벌이 미미한 것이 현실이다. 입법 목적이 노동자가 죽거나 다친 기업의 과실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안전한 사업장을 위한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을 권고하는 형태의 법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노동자가 추락사했는데, 사망이 아니라 난간 미설치에 책임을 묻는 법이다. 형법상 업무상 과실치사죄로 기소되더라도 사업주가 처벌받는 사례는 거의 없고, 처벌받더라도 ‘직접적’으로 사고 원인을 제공한 안전 담당 말단 직원 정도만 처벌되는 경우가 많다. 원청 기업이 처벌받는 경우도 거의 없다.”

- 산재 사망을 줄일 방안은.

“사업주에게 산재 사망에 대한 형사적인 책임을 무겁게 물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기업 경영의 우선순위에 산재 예방이 포함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기업처벌법은 일터의 산재뿐만 아니라 세월호 참사, 가습기 살균제 참사 같은 중대재해를 일으킨 기업 책임을 물으려는 법이기도 하다. 물론 법을 하나 새로 만든다고 해서 모두 해결되지는 않지만, 매년 일하다 죽는 사람이 2000명이 넘는 상황에서도 어쩔 수 없는 사고쯤으로 넘기는 기존 프레임에 균열을 내는 장치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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